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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밤

by 삼오십

사람마다 본인이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누군가는 태양이 떠오르고 하루가 시작하는 아침을, 어떤 이는 석양과 노을의 저녁을, 그리고 고요한 어둠의 자정 그즈음을 좋아하는 이도 있다. 나는 어떤 시간을 좋아하는가 물어본다면, 저녁이다. 분주하고 정신없는 하루가 마무리되면서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노을 진 저녁, 그 불붙은 듯이 강렬한 광경마저도 아름다운 해 질 녘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어릴 적에 난 모두가 나처럼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와 그런 대화를 나눠보기 전엔 말이다.


“아빠는 저녁이 되면 기분이 참 안 좋아. 쓸쓸하고.”


나는 그 말에 적잖이 놀랐다. 저렇게 아름다운 저녁 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쓸쓸하다니. 아버지는 뒤이어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빠 어릴 때는, 저녁이 되면 끼니 걱정, 땔감 걱정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도 많았고. 그때는 진짜 살기 어려웠어. 그래서 아빠는 해 지는 걸 보면 기분이 쓸쓸하고 안 좋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건 아니라는 것을. 사실 그것은 당연한 얘기였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느끼는 데는 예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어린 날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할머니, 지금은 하얀 밤이에요.”


녀석이 차창 밖을 바라보며 제 할머니에게 말했다. 녀석의 할머니이자 나의 어머니가 그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다.


“응, 그래? 까만 밤이야?”

“할머니, 지금은 하얀 밤이에요. 멋지지요?”


어머니는 아직도 못 알아들으신 표정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입을 열었다.


“‘하얀 밤’이래, 엄마.”


나도 녀석의 말을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건 아니었다. 다만 녀석의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발음을 가장 잘 알아듣는다는 자부심으로 통역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내 녀석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얀 밤이 맞네. 진짜네.”


저녁 해가 이미 넘어간 뒤였다. 차 안은 어두웠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이미 저녁이라기보다는 밤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직 하늘에는 미명이 있었다. 하늘이 파랗지 않고 상대적으로 하얗게 보였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의 마지막 빛이었다. 놀랍게도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얀, 밤. 정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까.


우리가 알고 있는 백야(白夜)와는 다른, 낮과 밤의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시간,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는 다른 종류의 것. 세상의 이치와 지식이 아직 채워지지 않은 갓 5살 된 녀석의 머리가 만들어낸 표현에는 내가 알지 못하던 샛길을 발견한 기쁨이 존재했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감정을 내 아이를 통해 느꼈다. 새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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