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파업으로 조금 미뤄지긴 했지만 아버님의 3박 4일의 입원과 수술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눈부시게 발전한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과 체계를 체험하며 감탄했다.
환기를 위해 아버님 병실 창문을 열다가 어김없이 떠오르는 기억들
2000년이었다.
1지망 2지망에도 써내지 않았지만 성적순인지 입사순인지 모르게 배정된 암병동에서의 첫 간호사 생활
일은 빠르게 손에 익어갔지만
병동 선배간호사들의 교육을 빙자한 무례함을 넘은 폭력적 태움과
항암으로 내 환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고 결국엔 돌아가시는 그 어둠의 굴레와
죽음의 사투들과 피자의 냄새들이 공존하는 괴상한 이질감 같은 것들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날은 내가 액팅을 하는 날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각 간호사들마다 자기가 맡은 환자와 병실이 있고 그 간호사들은 본인 담당 환자들에 대한 간호와 차트기록을 했으며 그 외로 액팅 간호사는 병동 전체 환자들의 투약, 활력징후 측정, 당수치 측정등 잡다한 일들을 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일명 몸빵간호사)
1인실에는 췌장암인지 폐암인지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환자가 새로 입원했었다. 3,4기쯤 됐었던 걸로 기억난다.
절망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분노하는 여타 환자들과 달리 평안해 보이셨고 간호사들에게도 친절하셨다.
그 옆에 계시던 부인은 슬픈 눈이 셨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남편을 보살피려고 애쓰던 선한 분이었다.
목사님이 그 병실에 병문안을 오셨고 부인께 목사님을 배웅하라 말씀하시고
부인이 병실을 나간 사이 그 환자는 저 창문사이로 몸을 던지셨다.
순식간에 병동 간호사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병원 내 조사관이 오고 전화벨이 계속 울렸으며 다른 병실에서 주사 투약을 하며 돌아다니던 나는 전화를 안 받냐는 날카로운 비명을 늘 고상한척하며 나긋하게 이야기하던 내 태움을 방관하던 주임간호사로부터 들어야 했다.
나중에 그 병실담당간호사는 경위서인지 뭔지도 적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병원의 병실을 갈 때마다 유리창의 저 창문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