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비움
인간관계에서 일방적인 비움이란 없다
어제 갑자기 연락이 뜸했던 아는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나의 개인 SNS 소식을 보고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는 정보를 주고 싶었나 보다.
사실 이 언니와의 인연은 9년 전 신혼 여행지인 푸껫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 부부는 패키지여행을 신청했었고, 같은 여행지의 그룹으로 만나 총 3 커플이 같은 코스로 움직이게 되었다. 막 결혼식을 올리고 온 뜨끈뜨끈한 신혼부부라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다툼이나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의 감정 등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5개월 된 임산부인 상태로, 같이 갔던 다른 두 커플과는 다르게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스노클링은 도전해 볼 수도 없었고, 마사지도 조심스럽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함께 했던 2 커플의 부부들이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나를 위해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었다. 차로 이동할 때 편한 자리로 앉게 배려해 주었고, 날씨도 너무 덥고 습한 상태라 힘들어할 나를 위해 물도 챙겨주었고 그렇게 살뜰하고 소소한 챙김을 받았다. 또한 여행지를 함께 다니며 각자의 커플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기도 하고 많은 추억을 나누었다. 그렇게 5박 7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가더라고 이것도 인연이니 꼭 한 번씩 만나자고 다짐하며 한 마음 한 뜻으로 마음을 모았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자주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가끔씩 물어보기도 하였다.
각각 연고지가 서울, 대구, 부산이라 마음이 맞지 않으면 사실 만나기도 쉽지는 않은 거리였다.
나의 출산 예정일을 언니들이 친히 기억해 주고 출산 전에 우리 부부를 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와 준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렇게 3 커플이 부산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출산을 앞두고 있는 나를 위해 언니들이 기저귀 케이크를 깜짝 선물로 준비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라 너무 감동이었고, 언니들도 곧 2세 계획이 있으니 나도 나중에 꼭 고마움을 갚아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첫째를 출산하고 축복스럽게도 2명의 언니들도 1년 이내로 다 임신을 하였고, 한동안은 각자의 육아에 전념하느라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이후 애들이 좀 크고 나름의 여유가 생기게 되니 대구에 사는 언니랑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연락을 유지해 오면서 가족끼리 여행도 1년에 한 번씩 계획하게 되었다.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년 전 부산에서의 여행 후 나를 더 가깝게 느꼈는지 언니가 나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의 말은 지금 상황이 좀 힘든데 현금 30만 원을 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언니가 그 돈을 빌리면서 나에게 조만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얘기를 해서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돈을 빌려주게 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 나만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돈을 갚기로 하겠다는 언니가 그 이후 아무 연락이 없었던 것이었다. 홀로 고민이 되었다. '언제 내 돈을 갚아주는 거지?' '내가 어느 타이밍에 돈을 갚아달라고 얘기를 꺼내야 할까?'
'언니가 여유가 되면 언젠가는 갚아주겠지.'라고 여러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고, 6개월째 접어드니 나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인연을 끊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큰 용기를 냈다.
언니에게 쏘아붙이듯 그동안 혼자 고민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언니 제 돈은 도대체 언제 갚아줄 거예요? 잊은 건 아니죠? 이 얘기 꺼내기도 사실 쉽지 않았어요. 사실 같은 애기 엄마로서 30만 원의 액수가 적은 것도 아니고, 언니가 금방 갚아줄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이게 뭐예요?"
그 말에 언니는 "OO야, 정말 미안하다. 그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어.
지금 상황이 여유가 안 돼서 당장은 힘들 것 같은데 2주만 더 기다려줄래?"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라고 마음속으로는 생각했지만, 이 언니는 나만의 기준에서 관계의 비움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결국은 2주를 더 기다려 7달 만에 그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언니에게 신뢰 관계를 이미 다 잃은 나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그 이후 실망한 언니에게 나는 내가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내 기준에서 이미 벗어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언니는 잊을 만하면 가끔씩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서는 나의 안부를 물어봐주고, 나를 위해 도움 되는 정보를 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언니의 그런 행동은 얼어붙은 내 마음에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제 전화를 받고는 내 생각이 조금 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유는 언니가 하부르타 독서지도자 과정을 함께 공부한 인연으로 맺은 7명의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데드라인을 정하고 하나의 목표로 글을 쓰면서 10월 말에 작가로서 출판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OO야, 너도 글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충분히 도전해 봐. "
그 말에 나는 "아, 언니. 저는 제 필력도 아직 너무 부족하고, 자기만족으로 글을 쓰는 중이라 출판을 위해서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누가 내 책을 읽어줄까요?"
그러자 언니는 "나는 아마 더 형편없을 걸. 같이 책을 낸 7명의 사람들 중에 2명은 이미 등단을 한 작가가 있어서 퇴고과정을 거쳐 글이 다듬어질 수 있었어. 너도 할 수 있어! 언제라도 도전해 봐." 덧붙여 언니는 출판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면서 책의 기획서, 작가 소개, 투고 출판사 등 도움이 되는 파일을 나에게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곧 출판을 앞두고 있는 책의 본문까지 모두를 말이다.
'내가 이 언니를 그 사건의 단면만 보고 판단을 잘못해 왔었나? 웬만해선 저렇게까지 모든 정보를 주기는 힘들 텐데......'
통화를 하는 25분 동안 정말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언니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의 일방적인 관계의 비움에 대해 반성하면서도 깊게 고민해 보게 되었다.
언니도 그 당시 돈을 갚지 못한 피치 못할 힘든 상황이 분명 있었을 테고, 언니의 상황을 동생인 나한테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든 부분이 있었을 테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는 그동안 상대의 입장에 대해 나름 잘 이해하려고 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직은 멀었다는 걸 느꼈다. 나만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인 비움을 실천했으니 말이다.
관계의 비움에 있어서 명확한 기준은 도대체 어디서 답을 찾아야 할까? 누군가가 정확한 해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는 과거와 똑같이 여전히 내 기준에 맞는 인연만 찾고 있었다는 현실을 마주하고 반성하게 된 하루였다.
비록 언니에게 내 진심을 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앞으로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니도 나에게 이전 감정이 남아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얘기하기는 힘들었을 텐데 용기를 내준 언니의 마음이 어찌 보면 참 고마운 건 사실이다.
앞으로는 사건의 단면만 보고 일방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을 것이 아니라, 비움의 관계였더라도 좋은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면, 내가 먼저 손 내밀어 그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는 용기도 필요하겠다는 점을 여실히 느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