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비움

실례를 무릅쓰고- 시누와 집 정리라니

by 노을책갈피

2023년 새해가 밝았다.

새 보금자리로 이사 온 지도 벌써 1년이나 지났다.

이사 초반엔 비움을 강력히 실천하다 보니 필요 없는 물건들은 75L 쓰레기봉투로 직행했다.

이불, 베갯잇, 요 등의 침구용품들이 주를 이뤘다.

10여 년동안 사용해 왔던 것들이 무용의 물건으로 하락하여 결국 버려졌던 것이다.

씁쓸하기도 했지만, 비우고 나니 한편으론 속이 시원했다.


요즘 자꾸만 눈에 팬트리의 물건들이 매우 거슬릴 무렵이었다.

경기도에 거주하시는 시누가 부산이 친정이기도 하기에 겸사겸사 부산에 내려오셨다.

부모님 생신, 명절 등 중요한 행사 때 연례행사로 오시기 때문에, 한번 부산에 오시면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주 정도 지내다 가신다.

사실 이번에 부산에 오시기 전, 나랑 나누었던 대화 주제가 있었다.

바로 정리수납에 관련된 이야기다.

시누는 최근에 정리수납전문가 2급을 12주 과정으로 수료하셔서 주변에 정리를 필요로 하는 이웃집에도 간간히 도움을 주고 계신다고 했다.

나도 예전에 호기롭게 정리수납 과정을 들은 적은 있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먼저 용기를 냈다.

"와~ 그럼 이번에 부산 오시면 우리 집에도 정리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꺼낸 이야기가 바로 2023년 1월 1일 지금,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실, 내가 그 얘기를 먼저 꺼내놓고도 시누께 부탁드리기가 정말 어려웠다.

시누와 올케라는 관계가 말해주듯 마냥 편하지도 않은 사이기도 할뿐더러, 팬트리의 꽉 찬 물건들은 평소에 나의 게으름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망설여지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정말 쪽팔림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이 분명했기 때문에 도무지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하신 듯, 시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신다.

"올케, 왜 저번에 팬트리 정리 필요하다고 안 했어? 오늘 시작해 볼까?"라는 말씀에 나는

"정말요? 힘드실 텐데... 이사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도 또 물건이 가득 차게 됐네요."

그러자 시누는 원래 살다 보면 새로운 물건으로 다시 채우게 된다며, 지금 결심했을 때 바로 실천하는 게 맞는 것 같다며 도리어 위로를 건네신다.

그러면서 양팔을 걷어붙이시더니,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뭐부터 하면 좋을까?"라고 제안까지 해주시다니.

감사하기도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상황. 정말 나도 뭐부터 정리할지를 도통 모르겠다.

시누는 눈앞에 보였던 커피머신 위아래로 있는 수납장들을 열어보셨다.

반은 비어있었고, 반은 채워졌지만 정리가 도무지 안 된 상황이었다.

정리수납전문가 과정을 최근에 수료하셨기에 형님은 배운 이론을 토대로 막힘없이 정리를 시작하셨다.

우선, 수납 목적이 같은 것끼리 묶으셨다.

팬트리에 아이들 도서와 내 책들로 일부가 찼기 때문에 그 책들을 꺼내셔서 커피머신 수납장 밑에 차례로 정리해 주셨다.

그런 다음 오른쪽 수납장에는 각종 전기용품들, 아이들 학용품류를 분류시켜 각각 정리 배치해 주셨다.

그리고 커피 수납장 위쪽은 텅텅 비어있었는데, 마침 팬트리에 있던 아이들의 보드게임이 종류가 꽤 많았다.

그 많은 보드게임을 크기별로, 그리고 사용의 빈도에 따라 아이들이 잘 사용하는 보드게임은 손이 잘 닿는 아래쪽으로 정리해 주셨다.

커피 수납장 위쪽 한편은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의 공간으로 가득 채웠다.

각종 나라별 원두와 베트남 커피 등을 종류별로 차근차근 정리해 주신 것이다.

그다음은 최대의 난관인 팬트리. 나도 한숨이 나오는데, 시누는 무슨 잘못으로 우리 집까지 오셔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실까.

속으로 너무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나의 마음과는 달리 시누는 속도를 척척 내셨다.

예전에 아기들 옷을 남편이 잠깐 직구로 대량 구입하여 판매한 적이 있었는데, 재고가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그 옷가지들을 비어있던 여행용 가방에 최대한 구겨 넣어 아가들 옷으로 가득 찼던 팬트리가 말끔히 정리되었다.


다음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각종 약품들과 영양제들.

그것은 비닐 팩에 따로 담으셨고, 그건 일반 약국에 따로 갖다 주면 된다는 설명을 덧붙이셨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라면류와 과자류들.

이걸 어쩔 것인가? 나는 그 라면류와 과자류들을 큰 세탁보관물에 한데 담아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정리했다. 그러기를 6~7번.

그 과정에서 버려야 할 옷가지들도 꽤 보였다. 그것마저 함께 비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기를 6시간이나 흘렀나? 모든 정리를 마무리한 시누께서 팬트리의 문을 열고 나오셨다.

마스크에 일회용 장갑까지 끼며 고군분투하신 결과, 우리 집 팬트리의 여백의 미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팬트리가 정리되기 전에는 팬트리에 난 창을 제대로 보지를 못했다.

창가 쪽에는 이미 물건들이 쌓이고 쌓여 시야를 일부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와~ 산 뷰가 이렇게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심했다.'

스스로를 자조 섞인 비판으로 다그치며, 고생한 시누에게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일 몸살나시는 건 아닐까, 괜히 부산까지 오셔서 고생을 자처하시는 건 아닐까.


감사함의 표현으로 나는 저녁상을 차린다. 나도 옆에서 은근히 힘들었는지 밥맛이 꿀맛이다.

"맛있게 드세요, 형님. 오늘 너무 고생하셨어요. 와~ 정말 정리수납 배운 이론대로 실천하시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한수 배웠습니다."라며 이야기를 보탠다.

그러자 시누는 "누군가 이렇게 도와주지 않으면 하기 힘든 게 정리더라고. 그래도 내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라고 넉넉한 웃음으로 화답해 주시는 형님.


2023년 1월 1일 새해를 이렇게 깔끔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다니.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우리 집 세간을 보여주는 내 용기도 한몫했지만, 형님의 넓은 인내심과 정리의 철학을 깨달은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부산 동생네까지 와서 정리를 자처하는 형님의 따뜻함이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고마움과 넉넉함인 것이다.

오늘 형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팬트리와 수납장을 정리된 데로만 꾸준히 유지해 나가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야 다음번에 형님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정리해 주신 보람을 느끼지 않으실까.

오늘 마침 형님이 어머님 생신 겸 부산에 내려오시는 날이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또 팬트리 정리를 하러 가야겠다.

진정 비움이란 끝이 없는 미로와도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