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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el Jun 14. 2023

세탁기

그 녀석이 부럽다. 주절주절..#£\%@!&......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는 오늘도 그 녀석에게 졌다.

오늘도 한 짐의 빨래가 내몸 안으로 훅 들어온다. 무슨 빨래가 그렇게 많은지. 매일해도 끝이 없는 것 같다.

하긴 식구가 좀 많아야지. 다섯 식구에, 세탁이 제대로 됐니 안됐니 불만하는 말 많은 시누이까지.

내가 이집에 처음 왔을 땐 아주 조용했다. 두사람만이 살고 있었고 말소리도 크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 오는 빨래는 아주 소량이었다. 왠만한건 고맙게도 집주인인 그녀가 손으로 조물거리는 것이다. 새 제품인 나를 소중히 다루어주기도 하여 고마웠다.

하지만 이제는 하루 두 번씩 나를 돌리는 것이 다반사다. 많은 양으로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두시간을 돌렸는데 연달아서 돌리기도 한다. 틈을 주지 않을 땐 울고 싶어진다.


나는 죽을 둥 살 둥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거실 한쪽에서 우아하게 폼 재면서 잘난 척 하는 녀석이 있다.

그 녀석이 얼마나 얄미운지 모른다. 아무리 태생부터 역할이 다르다지만 그 녀석은 무슨 복인지.

볼 때 마다 속상하다. 지금도 보면 거실 한쪽에서 예쁜 옷을 입고 한가운데 코사지 장식도 하고 편하게 있다.

그 녀석은 여름 한 철 장사(?)로 나머지 계절에는 예쁜 옷 입고 탱자탱자 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름에도 종일 일하지 않는다. 한참 더울 때 잠깐. 그러고는 얼마나 이쁨을 받는지.

말 많은 시누이도 외출에서 돌아와서는 ‘덥다! 더워’ 호들갑하면서 그 녀석을 켠다.

잠시 시간이 흐른만큼 거실에 냉기가 흐르기 시작하면 ‘아~좋다. 너가 없으면 어쩔뻔했니?’라고

코맹맹이 소리하며 그녀석을 쓰담쓰담 해주기까지 한다. 그럴때면 울고 싶어진다.

나는 매일매일 그들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도 고맙다고 말해주지 않고 쓰다듬어 주기는 커녕 발로 차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얼마 전 나는 너무 아팠다. 빨래를 안고 돌아가다가 너무 힘들어 멈춰서버리기를 몇 번째다.

아래쪽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나로서는 왜 그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집주인인 그녀가 왜 안되냐며 나를 툭툭 치다가 ‘어! 물이 새네’ 아래쪽에서 물이 샌다고 하는 것이다.

A/S에 전화를 하고 방문 날짜를 잡고 전화기를 끄면서 하는말 ‘에이! 또 돈먹게 생겼네’ 하며 한숨 짓는다.

이후 내몸을 잘 아는 A/S 기사의 의견은 그랬다. 아래쪽 **부분이 찢어져서 물이 새고 있고

요번에는 수리해놨는데 다시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되면 수리가 어려울거라는 진단을 하고 갔다.


이 집 식구가 된지 어언 13년. 그간 나도 참 많은 고생을 한 것 같다. 두명에서 여섯명으로 늘어난 식구들이 때때마다 벗어내는 옷들과 양말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감당해야 하는 이불들.

힘들다 투정하지 않고 내 역할을 다했왔는데 이제는 나도 많이 늙어진 모양이다.

하긴 거실 한 벽면을 채우던 테레비라는 친구는 여섯명이 돌아가며 본인들 선호대로 채널을 돌려대니

3년전에 나가 떨어져서 그 때 새 친구가 들어왔다.

그리고 냉장고라는 친구와 한번씩 대화해보면 그 친구도 나름 아픔의 시기를 겪었고

지금도 힘들어 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일 여섯명이 돌아가면서 열었다 닫았다 그 친구를 부여잡고 있을 뿐 아니라

여름철이 되면 더 괴롭힘을 받게 된다고 했다. 냉장고는 그래서 ‘다시, 여름’이 무섭다고 한다.


그런 생각들로 심란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위풍당당 에어컨이란 녀석이 더 크게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매일 그 녀석에게 지고 있었던 것이다.

같이 이 집에 왔는데 그 친구는 여전히 자신을 뽐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다음에는 나도 에어컨으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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