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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el Jun 23. 2023

순수를 입은 여행

10대의 마지막날, 20대의 첫날

누군가 그런말을 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된다고.

맞장구치며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에게 여행은 그 단어 자체만으로도 동경하게 되고 입가에 미소짓게 만든다.

마음속에 늘 여행을 품고 살고 '언젠가는 떠나야지...' 떠날 준비하며 주어진 하루를 보내게 된다.

나역시도 그러한 생각을 껴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여행은 기록이 필요한 일이다. 많은 곳으로 나름의 떠남의 시간을 가져왔지만 나의 여행은

늘 공백인 것 같아 안타깝다. 머릿속 기억만으로 내가 본 것들을 기억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터인데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음으로 여기 가봤었나? 혹은 가보긴 한 것 같은데 언제 갔었는지

기억이 가물한 경우가 빈번하다.

잘 여행하고 잘 기록 했다면 나의 감수성이, 나의 인생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때늦은 생각을 해본다. 물론 누군가는 그럴테지 '아직도 안늦었다고'

모든 여행은 끝나고 난 후 한참이 지난뒤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고 하는데..

여행 중 그 때 내가 본, 그 순간 느꼈을 감정을 꺼내 볼 수도 없다. 지금은.


내 기억에 의존한 한 때의 그리운 시절이 있다. 20살을 맞이한 그해 1월 1일 새벽

친구들과 이대로 우리의 이십대를 맞이할 수 없다는 막 솟아나는 용기로 7명의 처자들이

12월 31일 밤 마지막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한 친구의 언니가 서울산다는 이유로 목적지는 그곳이 되었다.

기차안 풍경을 기억하지도 못하리만치 우리는 설레였고 우리는 막연하게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쉼없이 재잘거렸다.

새벽녘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는 서울역에 내렸다. 우리가 살았던 세계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 이른 새벽이 낮처럼 환하고 사람들은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간이 좌판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 소형 리어커에 간식거리 파는 사람들,

알아듣지 못할만치 빠른 그들의 언어들. 말로만 혹은 TV로만 만났던 서울역은 그런곳이었다.

모두가 부지런하고 바쁘고 우리와는 사뭇 다른 서울역의 모습들.

우리는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소형 리어커로 갔다. 아마도 오뎅과 컵라면 류의 간식을 팔았던 것 같다.

서울 도착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찾아온 배고픔으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계산을 하고 돌아서서 저만치쯤 가다가 계산을 담당했던 친구가 말했다.

컵라면 한개 값을 치르지 않은 것 같다고.

한꺼번에 주문하다 보니 물건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서로 놓쳐버린 듯 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웅성웅성 고민했다. ‘그냥 가자’는 친구와 ‘아니다 주고 가자’는 친구로 나뉘었다.

하지만 ‘서울가면 눈뜨고도 코 베인다’,  ‘서울 사람들 무섭다’는 말 앞에서 결국 우리는 순수?를 선택했다.

진주 처자들의 순박한 마음이 간식 장수의 컵라면 한 개 값을 채워준 셈이 되었다.

그러고 나니 우리의 마음도 편해졌다. 우리는 딱풀같이 딱 붙어서 쉼없이 수다하며 길을 갔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추억들이 그립다.

얼마전 다녀온 여행의 감성으로 우리의 순수했던 그날을 소환해본다.

감회랄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날이 새롭게 다가온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여행이 주는 경이로움에 가슴 떨리고 있으니 살아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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