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하얗게 내리던 날

엄마는 나에게 제안을 했다

by 오그레스

토요일이었어요. 엄청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숨이 막혔어요. 누군가가 나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서 헉 헉 소리를 내며 힘겹게 숨을 내뱉으면서 일어났어요.

순간 갑자기 여기가 어딜까? 처음 와본 듯한 여기는 어디지?라는 생각이 맴돌았어요.

머리가 지끈했어요. 창 밖으로 빗소리가 들렸어요.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건지... 생각이 나질 않는 꿈을 꾼 건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눈을 떴어요.

창밖을 보니 비가 하얗게 내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두려움에 사로 잡히고는 해요.

가끔 소름이 끼칠 때도 있어요. 비 오는 날에 누군가가 떠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누군가가 떠나면서 슬프게 흘리는 눈물 같기도 해요.

정신과 선생님 앞에 앉아,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떨리고, 목이 막히는 것 같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열 살 때 엄마가 나에게 조심히 와서는 할 말이 있다고 하셨어요.

평소에 그런 행동을 안 하시니까 내 몸의 근육이 바짝 줄을 서듯 모이더라고요.

말똥 말똥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만 봤어요.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궁금하기도 했지요.

"미안해."

"뭐가요?"

"잘해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살아서... 미안해."

"이렇게 사는 게 어떤 건데요? 엄마는 나한테 무지 잘해주는데요, 나는 지금 다 좋아요."

"미안해... 너는 내가 말하면 잘 따라와 줄 거니?"

엄마는 힘겹게 입을 떼셨어요.

"그럼요,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엄마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엄마는 세상을 살기가 어려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무서워요. 엄마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요?"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죽음?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죠. 아빠가 돌아가셨다고는 들었지만 우리 엄마가 죽는다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같이 죽을까? 내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어린 너에게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죽으면 혼자 남을 네가 걱정이 돼서, 그래.

우리 가끔 가는 소풍 가는 거기 있잖아. 거기 앞에 강 있잖아. 거기 빠져 죽을까?"


나는 할 말을 잃었어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창 밖에 내리는 비처럼 새 하얗게 되었지요.

그리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어요.

"엄마, 나는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다 맛있어요. 엄마가 해주는 도시락도 맛있어요.

엄마랑 이렇게 집에서 같이 살고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고... 엄마랑 손 잡고 시장에도 가고...

엄마 말 더 잘 들을게요. 나.. 죽는 거는 무서워요. 엄마.. 내가 엄마말 안 들어서 그래? 내가 엄마 말 더 잘 들을게. 미안해. 엄마 속상하게 해서. 나 때문에... 미안해요."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 마음이 너무 약했나 봐. 미안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어린 너에게 내가 몹쓸 말을 했어. 미안해."


그날 이후 나는 늘 두려움 속에서 살았어요. 혹시라도 엄마가 진짜로 떠나버리면 어쩌나… 나는 혼자가 되면 어쩌나… 엄마가 말없이 몰래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 매일 불안했어요.


내 말을 들으며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믿어지고, 내 안에서 오래 눌려 있던 돌덩이가 아주 조금 움직이는 듯했다.


"저는 엄마만 있으면 돼요. 아빠도 저를 낳고 돈이 부족해서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를 더 좋게 길러 주고 싶어서 일하러 갔다가 사고를 당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도 저를 떠나면... 저 때문에 두 분 다 돌아가셨다면... 제가 태어난 게 두 분에게 너무 미안해요."


정신과 선생님에게 힘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잠시 침묵하다가, 아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의 어린 당신은 너무 무섭고,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그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나이였죠.
하지만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엄마가 그만큼 힘들고, 약해져 있었던 거지…
당신이 잘못해서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 오래 묻어 두었던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그날 이후로 늘 불안했어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도 아빠도 더 행복했을까… 내 존재가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계속 들어요.”


선생님은 내 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의 짐으로 태어난 게 아닙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예요.
엄마가 힘들다고 해서, 당신의 존재 가치가 바뀌는 건 아니에요.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당신을 괴롭히지만, 이제는 그 기억을 새로운 의미로 바라봐야 합니다. 어린 시절의 당신은 정말 용기 있게, 엄마를 붙잡았던 거예요. 그 용기가 엄마를 살게 했고, 결국 지금의 당신을 여기까지 이끌어왔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서 억눌려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그날의 나’를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용기 있는 아이로 떠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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