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조건

팔자 좋은 여편네들 -그때의 기록 06

by 노을

불치병을 앓고 있다.

어쩌면 유전병일지도 모르겠다. 자매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지만,

그중 내가 특히 심하다.



그 병이 중증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대학교 때이다.


MT를 갔다가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이미 차가 끊긴 뒤였다.

집이 인천인 나는 생전 처음 '총알택시'라는 걸 탔다.

정말 총알같이 빠르게 집 근처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인하대 후문 쪽이요."

"여기 아니에요?"

"조금만 더 가주세요."


인하대를 한 바퀴 돌고 기사가 또 묻는다.

"여기 왔던 데잖아요?"

"아, 그게 밤이라."

"아이씨! 뭔 여자가 집도 못 찾아!"

"아, 죄송해요. 여기서 내릴게요."


시간이 돈인 총알택시는 그날,

인천까지 온 시간만큼이나 인하대후문 주변을 돌다가

끝내 욕을 남기고 가버렸다.



아무리 주의 깊게 살펴도

낮과 밤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차를 탈때와 걸을 때의 길은 서로 다르게 뒤틀렸으며,

어제와 오늘은 마치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휴게소나 극장의 화장실에서

서너 걸음, 입구의 반대편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건 다반사였다.



신혼 초, 남편이 근무인 주말에

앞집 선임 중대장 가족이 사준 매운탕을 먹고 함께 돌아오는 길이었다.

베란다에 초록 천막이 쳐진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도 군인 아파트 인가 봐요?"

"크크크, 자기 엄청 웃기다. 농담도 잘하네!"

"???......아!"


우리 아파트였다.



하양에 살 때,

세 가족이 함께 후배 차를 타고

대구의 서문시장에 간 적이 있다.


아이를 업은 채 양손 가득

커튼과 식탁보를 만들 천을 사서 약속장소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후배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길을 묻고 나서야 내가 반대쪽에 와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핸드폰도 없을 때니,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업은 아이는 자꾸 흘러내리고,

양손에 들은 비닐봉지는 이미 손을 파고들어 피가 통하지 않았다.

길은 끝없이 늘어져있었고,

시간마저 무겁게 흘렀다.


몇 번이나 짐을 내려놓고 아이를 추켜가며 돌아간 그곳에 차가 없다.


한 시간 이상 늦은 나를 기다리다가 지친 가족들은 이미 떠나버렸다.

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내가 말도 안 하고 혼자 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아이를 추켜 업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와 택시를 타고 늦게서야 도착한 나는,

오자마자 그들에게 미안함을 전해야 했다.



운전을 시작하니 그 병의 결과치는 더 커졌다.

길을 헤매는 건 당연하고,

고속도로에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구세주 같은 네비의 도움이 시작된 뒤에도 한 두 바퀴 도착지 주변을 헤매는 건 여전했다.



군인가족은 부부동반 회식이나 모임이 잦은 편이다.


남편이 대구에, 내가 계룡에 살고 있을 때였다.

습관처럼 여유 있게 움직였음에도

여차 하는 순간

빠져나올 곳을 지나쳤다.

경산까지 가서 돌아와야 했다.


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세 시간이 넘게 걸렸고,

결국 40분 이상 늦고 말았다.

회식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나는 또 어색한 표정으로 미안하고 죄송해야 했다.



길을 헤매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불치병과 함께 따라온 또 다른 병이 있다.


병문안을 갔다가,

같이 간 언니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낯익다 싶어 어색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언니, 누구지? 어디서 많이 봤는데."

"미용실 원장이잖아."

"아! 맞네. 근데 밖에서 보니 모르겠어."


대여섯 번도 더 간 미용실 원장이었다.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있는 사람도 길거리에서 만나면 어디서 본듯한 사람이었고,

회식자리에서 만난 남편의 동료는 사복을 입으면 낯선 사람이었다.



가평에 군수 장교로 갔을 때이다.

군수 참모와 인사 참모가 너무 헷갈렸다.


"저분이 인사참모야?" 후배가족에게 물었다.

"선배님네 군수 참모잖아!"

"너무 헛갈려!"

"별로 닮지도 않았구먼!"


그러니 참모 사모님을 알아볼 리 만무했다.

이사를 하고 인사를 가야지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 때였다.


사모님 한 분이 우리 집으로 아들을 찾으러 왔다.

"놀다가 우리 애랑 나갔는데요."

"아~!"


인사도,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후배가족이 전화를 했다.

"선배님, 그 사모님이 군수참모 사모님이잖아!"

"아이씨! 어떡하냐?"


다음날, 더는 미룰 수 없어 전화를 했다.

전날의 일은 모른척한 채로.


"안녕하세요? 사모님.

새로 온 군수장교 가족이에요.

인사를 드리러 가려고요."

"... 인사는 뭐."

"그래도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자기, 이미 내 얼굴 알 텐데!"


꿀꺽 침을 삼켰다.

"제가요?"


어쩔 수 없었다. 끝까지 모른 척할 수밖에.

"지금 찾아봬도 될까요?"


옆 통로 삼층,

사모님의 집이 한없이 높게 느껴졌다.


똑똑똑.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사모님! 군수장교 가족인데요."


한 박자 늦게 문이 열렸다.

삼분의 일 정도만 열린 문 사이로 사모님이 얼굴을 내미셨다.


"나 본 적 있지?"

"아! 사모님이셨구나! 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잘 못 알아봐서,

미처 알아 뵙지 못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현관문이 조금 더 열렸다.



그날 사모님과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가끔,

불치병과 함께 따라온 합병증은

군인가족인 내게

최악의 조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