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또 이사

팔자 좋은 여편네들-군인가족의 라떼이야기03

by 노을

25년 8월 7일

낼이면 또 이사를 해야 한다.

결혼 후 13번째이고 민간인으로 첫 번째 이사다.


남편이 혼자 나간 5번을 합해서 등본의 주소내역이 21번, 두장을 넘어간다.

그런데 그건 군인가족 평균과 비교해도, 23번이나 이사한 친한 후배랑 비교해도 적은 횟수다.


십 년간 맞벌이를 한 때문이기도 하고, 많은 시간 육군본부에서 군생활을 한 남편 덕분이기도 하다.


일반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해도,

직장이나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의 이동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어디로 갈지 선택의 기회는 거의 없다.

발령이 나면 무조건 가야 한다.

일주일, 빠르면 삼일 만에 그곳에 신고를 해야 한다.

급한 짐만 싸서 회관이나 독신숙소에 머물며 집이 나기를 기다린다.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때부터 남은 가족의 몸과 맘도 바빠진다.

집이 나면 언제든지 이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빨리 집을 비워주어야 기다리는 후임 장교도 이사를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수인계에 부대를 파악하기도 바쁘고,

휴가 내기도 어려운 남편들은

이사에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이삿날 시간을 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윗분을 만났다고 생각하던 때이다.

이사의 거의 모든 건 또 오롯이 가족의 몫이다.


중. 고등 3학년의 아이가 있는 경우 예외가 되지만 이사가 늦어지면 월세보다 비싼 벌금을 물기도 한다.


지금은 예외규정이 늘어났다.

잦은 이사를 줄여주겠다는 취지로 근거리 부대는 이사를 안 해도 된다.

살고 있는 사람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집이 안 나와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5~6개월 기다려 이사를 했는데, 6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기도 한다.


아이들의 학교문제까지 겹쳐지면 머리는 더 아파진다.

손 없는 날인지 휴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될수록 빨리 이사하는 것이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다.


이사비가 지원되지만 들어간 만큼 주는 것도 아니다.

거리를 계산해서 정해진 만큼만 주는 거라 늘 그 이상의 비용이 추가된다.


가기 전에 챙겨야 할 사람, 밥이라도 먹어야 할 사람, 기본 도리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몸도 맘도 경제적으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집의 상태가 심상치 않고,

좁은 아파트에서 이리저리 가구를 옮겨봐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을 때쯤의 이사는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와 흥분, 설렘이 되기도 한다.


생전 와 볼일 없던 곳에서,

이쁜 곳도 가고 맛집도 찾아보며 그 지역의 여기저기를 알아가는 것으로,

이동이 제한돼 멀리 가지 못하는

여행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이사라도 가서 집도 정리하고 분위기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잦은 이사로 생긴 습관적 '역마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2년 대구로 갔다 온 일 년을 제외하고 17년을 계룡에서 살았다.

어느새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두 아이가 직장생활을 하고

내가 군인가족이 되었던 그 나이가 되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다르다.

섭섭하고 아쉽지만 다시 올 거야 하고 떠난 그때와는.


가슴이 먹먹하고 주먹만 한 뭔가가 울컥울컥 올라와 목구멍을 콱 막는 거 같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다.


긴 시간 군인, 군인가족으로 살아온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불안이나 초초일지 모른다.

아무튼 예전엔 느끼지 못한 그런 감정으로 마무리 이사준비를 한다.


버릴 , 나눔 할 , 두고 갈 것.

스티커를 붙이고 나니 얼추 준비가 끝났다.


'낼 힘든 하루를 버티려면 일찍 자야 되는데...' 하고 되뇌어도

이사 전날은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며 잠을 설치곤 한다.


오늘은 아마 더 그럴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미련 많은 마음을

어디에 챙겨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육군대위 월급이면 둘이 실컷 먹고살 수 있다는 꾐에 빠져,

4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했다.

남편을 따라 증평이라는 곳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교직생활의 권태로움과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한때였고,

인천서 증평까지 떨어져 살고 싶지도 않았다.

제복이 잘 어울리는 믿음직하고 당당한 남자를 믿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잘못됐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받아 든 급여 명세서엔,

내가 받던 월급보다 적은 금액의 수령액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증평에서 신혼 생활은 채 열 달도 안돼 끝이 났다.

경북 하양의 특공부대로 발령이 났다.

첫 번째 이사였다.



이삿짐센터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한통운에서 큰 트럭을 지원해 줬다.

여기저기서 구해온 종이박스로 몇 날 며칠 둘이서 짐을 쌌다.


주임원사님과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실었다.

통닭이나 중국요리를 시켜주는 것으로 미안한 맘을 대신했다.


부대밖에 나오기도 쉽지 않은 그 시절, 그렇게라도 콧바람을 쐬고 싶어 하기도 한. 심지어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삼십 년 전 이야기다.


짐을 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 달이 넘도록 건조 주의보가 내렸던 늦겨울이다.

하필이면 첫 이사를 하는 그날 비가 내렸다.

대충 포장한 열 달도 안된 농도, 식탁도 냉장고 박스도 젖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초록색 천막을 씌우고,

굵은 검은색 밧줄로 여기저기를 묶었다.

꽁꽁 묶인 신혼살림과 함께

마음도 묶인 듯 답답함이 차올랐다.



네 시간 이상을 달려 경북 하양에 도착했다.

겨울 끝자락의 논과 밭을 지나

삐쩍 마른 덩굴로 덮인 포도밭을 지났다. 과수원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회색빛 하늘로 팔을 뻗고 있다.


큰길에서 2.5킬로

인적도 없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언덕길을 지나

부대정문 옆으로 달랑 한동의 아파트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13평 오 층 아파트.


4층 베란다에 서니

삭막한 복숭아 과수원 사이로 두 구의 이름 모를 묘가 내려다 보인다. 으스스 한기가 느껴졌다.

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본격적인 군인가족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