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길을 헤매다...

길가다 문득!

by 순간수집가

지난 11월, 친구들과 함께 뮤지컬 〈빨래〉를 보았다.

울다가 웃다가, 어느 순간에는 숨을 고르며 무대 위를 바라보게 되는 공연이었다. 화려한 장치도, 익숙한 스타도 없었지만 무명 배우들의 연기는 놀라울 만큼 단단했다.

왜 이 작품이 20년 가까이 사랑받아 왔는지,

왜 교과서에까지 실렸는지, 그 이유를 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삶을 미화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날것의 힘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있었다.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리는 이야기.

하루하루를 버티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사는 묵직한 울림으로 남았다. 특히 여주인공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설정은, 왠지 모를 친밀함으로 내 마음 한구석에 오래 머물렀다.

빨래,무대인사



공연장을 나선 뒤에도 이상하게 ‘빨래’라는 풍경이 자꾸만 마음속을 유영했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떠난 일본 여행. 낯선 이국의 거리에서 나의 시선을 가장 먼저 붙잡은 것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집집마다 나란히 널린 빨래들이었다.


베란다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거나, 작은 마당과 창가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옷가지들. 그 순간 뮤지컬 속 장면들이 겹쳐졌다. 빨래는 말이 없지만, 사실 그 집의 하루를 가장 정직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어제의 노동과 오늘의 일상, 그리고 내일도 계속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의지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풍경들을 사진기에 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근사한 여행지의 기념사진이라기보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모으는 일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빨래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서민들의 삶 한복판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뮤지컬이 남긴 여운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그 풍경들을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예술이란 참 묘하다.
공연장의 조명이 꺼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관객의 시선을 바꿔놓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낯선 골목을 걷다 빨래를 마주하면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곳에
누군가의 소중한 삶이 젖어 있거나, 마르고 있기 때문이다.


가고시마, 빨래

속삭이는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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