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권 독서의 서막
엄마는 올해 여든여섯.
많은 사람들이 이 나이를 떠올리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보다
한결같은 쉼을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의 인생은
오히려 여든에서 조용히 다시 열렸다.
그 무렵이었다.
엄마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80세가 되니까… 이제는 책을 좀 읽어볼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처음엔 가볍게 꺼낸 말이었는데,
책을 펼치고 나서는 너무 재미있었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엄마의 독서는
고요한 불꽃처럼 번졌다.
역사든 소설이든 과학책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셨다.
아버지와 둘이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가
책을 빌려오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지난 2월에 떠나셨다.
그 후부터는 책을 들고 오는 일이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가끔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오면서도
이전보다 더 깊어지고 있는
엄마의 ‘활자 세계’를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난 6년 동안
엄마가 읽어낸 책은 1,300권이 넘는다.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책마다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독후감을 남기신다.
인상 깊었던 내용과, 엄마만의 생각과 감상으로 채운 기록들.
나는 엄마의 단아한 글씨를 볼 때마다
‘나이 듦은 둔해짐이 아니라
다른 빛으로 다시 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엄마의 새로운 도전은 '시(詩)'다.
천 권이 넘는 문장들 속에서
천천히 응축된 언어의 씨앗이
이제 엄마의 목소리로 조용히 발아하는 것 같다.
최근에는 엄마와 함께
강릉의 작은 독립서점들을 함께 다닌다.
그 공간에 들어서기만 하면
엄마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서점의 조용한 공기,
테이블 위 책들의 잔잔한 향기,
그 속에서 엄마는 다시 한 번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엄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꿈을 꾸는 작가이고,
멈추지 않는 호기심의 주인공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스친다.
엄마의 인생은
여든 이후가 가장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끝없는 서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