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마음껏 만끽해본 당뇨 효과

첫 번째 기적의 기록

by 광녀의 인생철학


늘 매점을 드나들던 나는 항상 고혈당을 유지했다. 젊음이 좋긴 좋다. 중학생 때까진 수시로 혈당 체크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무서워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 몰래 인슐린 주사를 늘 맞았었다. 고등학생이 된 후, 엄마의 잔소리가 사라지고 인슐린 주사를 굳이 맞을 필요가 없어졌다. 늘 나의 몸은 고혈당이었지만 주사를 굳이 찾아 맞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고혈당이 되면 일상생활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때는 당이 높아도 버텨졌다. 회복이 무척이나 빠른 듯했다. 젊은 게, 인정하긴 싫지만, 좋긴 진짜 좋은 게 분명하다.


고혈당으로 인한 갈증은 정말 목이 타들어갈 정도로 심각하다. 아주 끈~~적한 침이 입속 안을 쩍쩍 달라붙게 만들어 지독 시린 냄새를 풍기며 바짝 타들어가는 갈증이다. 이 정도의 갈증을 느껴본 적 있는가? 당뇨환자의 갈증은 이토록 지독 시리 독했다. 나이가 어려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아도 생활은 가능했지만, 그 타들어가는 고혈당 갈증은 늘 나와 함께 했다. 그로 인해 내 손에는 늘 마를 날이 없었던 물통이 쥐어져 있었다. 갈증이 심하게 날 때마다 물통의 물을 아주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가 천국이었다. 지금의 나는 아무리 갈증 나도 물을 그렇게 벌컥벌컥 마시지도 못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당뇨도 아닌 우리 반 남자들이 당뇨환자인 나 못지않게 갈증을 참 수시로 느꼈다.


실업계고였던 우리 학교는 인성교육을 중요시 여기는 학교로 유명했다. 심지어 여학생들에게 젖은 머리로 등교하지 마라며 당부까지 하셨다. 남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한다나 어쩐다나. 예고도 없이 소지품 검사도 수시로 하셨다. 그러나 뛰는 쌤들 위에 나는 머스마들이었다. 어따 숨겼는지 기똥차게 숨겨놓고 쉬는 시간마다 구름과자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왔다. 내가 또 과자 좋아하는지는 우째알고 구름과자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머스마들은 항상 나를 찾았다.

"김민, 깁 미 워터 프리즈(give me water, please)"

구름과자도 엄청난 갈증을 일으키는 게 분명해 보인다.




얼마 전 책상 정리하다 1학년이 끝날 무렵, 친했던 학우들끼리 주고받았던 롤링페이퍼를 발견했다.


-아프지 말고 좋은 남자 친구 사귀어라, 꼭. Merry christmas
- 미니야~2학년 때도 공부 열심히 하구 건강히 잘 지내~
-김미니 잘살고 방학 잘 보내라
-아프지 말고! 상큼하게 지내라~ 2학년 때 알고 지내자고~ 아하하
-김민~~ 2학년 때도 연극부랑 겅부 열씨미 하고 방학도 잘 지내고 아르바이트 열씨미 하장~~
-미니 - 2학년 때도 연극 연습 열심히 하구- 꼭 건강해
-김미니~
1학년 때의 착한 마음 잃지 말고~
2학년 때도 공부 열씨미 하구 착한 마음 계속 간직해라~ 메리 크리스마스~^^
-건강하게 지내라!
-미니야 인자 건강해지고 방학 잘 보내
-김미니 1년 동안 즐거워따! 2학년 때도 잘 지내라!
-항상 깜씨랑 열띠미 살아라! 2학년 때도 열띠미 겅부ㅋ
-1학년 때 잘못해줘서 넘 미안하구...계속 잘 지내자.. 글고 좀 고만.. 아프길..
-연극 짱.
-노른자?? 홧팅.
-겅부연극 연기 잘해
--어이~ 연극부 아주 잘하게나 후후~ 연극부 화링
-니 장래희망인 연예인...열뛰미 노력해서 되길 바래. TV는 사랑을 보고 에서 날 찾아라.
-미니야 넘 멋있드라!!
-연극 더 열씨미해라
-연극 넘 잘혀~ 건강하구~ 내년에도 뭐든지 열띠미 혀~
-멋지다는 말 뿐이 몬하겠다.
-춤 디기디기 잘 추든데^^* 미니만의 무대 더 갖길바라거^^~
--미니 ~니 잠자리 계속 유지해라. 2학년 때 신입생 오면 대면식~ A! CROSS
-잠 쫌 고만 자라 ㅋㅋㅋ 넘 잘잔다
-아프게 보이는 표정 이용해 먹지 마라! 난 니 수학 시간에 자는 거 진짜 베리 부럽다


나의 롤링페이퍼엔 건강이야기, 연극 이야기, 잠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진짜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이 문구를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 웃음과 더불어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고혈당이 되면 타들어가는 갈증만 있는 게 아니다. 미친 듯이 잠도 같이 쏟아졌다. 공부하기 싫어 잠 오는 척하는 거 진짜 아니다. 진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함이 몰려온다. 늘 간식을 먹고 당을 올리기만 하고 인슐린 주사도 맞지 않았으니. 아무리 젊었다지만 갈증과 덩달아 오는 졸음도 내가 어찌할 수 없었다. 난 진짜 겁대가리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졸리면 그냥 엎어져 잤다. 쌤께 혼날까 두려운 게 없었다. 아니 두려움보다 저절로 감기는 두 눈을 주체 못 했을 수도 있다. 초반엔 참고 견뎠다. 그러나 지속되는 고혈당에 더 이상 참고 견디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쌤이 혼내면 혼나지 뭐.'

그냥 수업시간에 대놓고 엎드려 잤다. 종소리가 울렸다.

쌤이 나를 혼내거나 깨우지 않고 수업이 끝나 버렸다. 어라?


그 뒤로 수업시간에 대놓고 자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선생님도 나를 깨우거나 혼내시지 않으셨다. 신기한 노릇이다. 어찌 됐든 나는 좋았다. 그냥 혼날 작정으로 잤는데 아무도 뭐라 하시는 쌤이 없었다. 점점 나는 친구들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고만 쫌 자고 일어나라"

쉬는 시간 친구가 깨워주면 베개 삼아 베고 있는 교과서에 한껏 묻어있는 침을 닦으며 일어났다. 참 이상한 노릇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고혈당으로 인한 졸음은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상황을 그저 만끽했다.


어느 날, 담임 쌤이 교무실로 부르셨다.

당뇨를 앓고 있으면서, 입학하자마자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는데 늘 밝아서 보기 좋다며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라고 말씀하셨다. 이후로도 담임쌤과 부담임쌤께서 아주 많이 챙겨 주셨다. 여자셨던 부담임쌤은 매일 나에게 메일을 보내주시며 안부를 묻고, 힘이 될 수 있는 문구를 하나씩 보내주셨다.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다. 이때 알았다. 수업시간에 대놓고 자도 아무도 뭐라 하시지 않으셨던 이유를.




매일 메일을 주고받았던 부담임쌤과는 무척이나 친한 관계가 되었다. 늘 나를 긍정적으로 봐주시고 신경 써주시고 계신다는 느낌이 든든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두 선생님의 배려와 관심이 조금씩 과해진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소풍 대신 1년에 4번 등산을 했다. 전국에 있는 웬만한 산은 다녀본 듯하다. 그렇게 등산을 하고 돌아오면 후기를 작성하라 하셨다.

국어시간.

국어쌤이 수업을 마치고 나가시며

"이번에 등산 후기 적은 거, 상 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00(서기였던 눈 크고 이쁜 친구)이가 받을 것 같다. 이상."

이쁜 얼굴만큼이나 글씨를 이뿌게 써 서기가 된 내 뒷자리 여자 친구가 이번에 상을 타게 된 모양이다. 이쁜 글씨만큼 글도 잘 쓰나 보다. 그 소식을 듣고는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 친구는 쑥스러운 듯,

"뭐 확실한 것도 아닌데 뭐" 라며 웃었다.


며칠 뒤, 담임쌤이 상장을 들고 들어오셨다.

우리의 눈은 서기에게 향하며 미리 축하의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김미니"

엥? 나? 내가 왜...

친구들이 다 뻥져 서기 친구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교탁으로 나갔다. 서기 친구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야 할 상장에 내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었다. 상복이 없었던 나였지만 이번 상장만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쉬는 시간. 친구들의 눈치가 너무 보였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양심이 찔렸다. 서기에게 갔다.

"00아, 미안. 이거 니껀데..."

"아이다. 원래 확정된 것도 아녔는데 뭘. 니가 더 잘 썼으니깐 받았겠지. 괘안타 내는"

얼굴도 이쁜 게 말도 이레 이쁘게 한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다. 왠지 다른 친구들도 눈치를 계속 주는 것 같다. 수업시간에 대놓고 자는 정도는 부러움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건 아무리 착한 동기들이라도 이해해주기 힘든 상황 같았다. 얼른 교무실로 쫓아 내려갔다.

"쌤, 이 상 원래 00 이가 받기로 된 거 아녔어요? 그냥 00이 주세요."

"아니다. 니가 잘해서 받은 거지. 상 네 거야"

"저번에 국어쌤께서 00 이가 받을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바꿔주세요"

"이미 다 결정 난 거다. 번복은 없으니깐 가져가그라"


단호히 이야기하시는 담임쌤 말씀에 어쩔 수 없이 교무실을 나왔다. 한 번도 친구들의 눈치를 본 적이 없었던 내가 교실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눈치가 보였다. 내가 쓴 글이 학교 회보에 실린다고 한다. 내 글이 공식적으로 실린다는 게 기분 좋아야 되는 일인데. 그다지 기분 좋지가 않다. 국어쌤께서 잠시 교무실로 와보라 하신다.

"쌤, 쌤께서 이 상 00 이가 받을 것 같다 하시지 않았어요? 근데 왜 제가..."

"그러게. 그렇게 됐네."

교무실로 부른 국어쌤께서 내가 쓴 글의 중간 내용을 살짝만 수정하자신다. 담임쌤의 입김이 들어간 게 분명한 것 같다. 그렇게 나의 글이 회보에 실렸다. 그래도 같은 반 학우들은 참 착했다. 좀 어이없는 사건이긴 했지만 이후 나에게 티 한번 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체육시간.


1학년 체육복은 시퍼런 스머프 체육복이었다. 선머슴 같은 우리 반 가스나들은 대놓고 교실 안에서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쑥스럼 많은 사내아이들은

"쫌 화장실 가서 갈아입으라"라며 본인들이 늘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고 왔다. 그렇게 체육시간 전, 옷 갈아입는 시간은 늘 여자들은 교실에서, 남자들은 화장실에서 갈아입게 됐다.


운동장에 쪼롬히 스머프들이 모였다. 체육쌤이 뭐 하라 시키셨는데 우리가 말을 듣지 않았나 보다. 체육쌤께서 단체로 운동장 끄트머리에 있는 등나무를 치고 돌아오라 하셨다. 선착순 3명!

선착순이란 소리에 기겁하고 내 달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아니다 그땐 국민학교였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에는 난 참 달리기를 잘했다. 키가 작아 늘 키 작은 친구들과 달리기한 게 유리했을 수 있겠지만 난 늘 달리기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등 하고 받아간 노트와 연필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 당뇨가 나에게 옴으로써 달리기 실력이 도망가 버렸다. 그렇게 숨차고 힘들 수가 없다. 쏜살같이 뛰어갔다 오는 아이들 저 먼발치 후발대로 도착했다. 선착순 3명을 제외하고 다시 다녀오라 신다. 다시 다녀왔지만 소용없었다. 자꾸 남자들만 선착순 후보에 드는 게 맘에 걸리셨나 보다. 남학생은 등나무, 여학생은 그 앞에 있던 기둥을 치고 오라 하셨다. 이번엔 왠지 승산 있어 보였다. 있는 힘껏 달렸다. 승산은 개뿔. 소용없었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운동장을 내리쬐는 햇살은 뜨거웠다. 남 눈치 전혀 안 보던 내가 점점 잔꾀가 오르기 시작했다. 수도를 겸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양심을 속이는 언행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자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지만, 당시 나는 그렇지 않았다. 때와 장소에 따라 내 편의대로 양심을 속이는 짓을 많이 했다. 엄마의 지갑에 손댄 것처럼 말이다.


그날도 몸이 지치면서 꾀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 전에 전력질주로 달려서 그랬는가. 이제 힘차게 달릴 힘도 없다. 다시 출발했다. 선두주자로 뛰는 남학생들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등나무를 찍고 나를 향해 되돌아오는 남자들이 보였다. 그 남학생들 사이에 스며들어 얼른 몸을 출발지 방향으로 돌렸다. 순간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 친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양심이 엄청 찔렸다. 그러나 나는 그 찔리는 양심의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출발점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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