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부메랑

첫 번째 기적의 기록

by 광녀의 인생철학

이틀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어? 누구지? 여보세요.”

“저 혹시… 김미니 씨 되시나요?”

“네”

“혹시 교통사고 나신 적 있으시죠?”

“네, 그런데요. 누구신가요?”

“저 그 아이 엄마예요.”


지금으로부터 딱 2년 전,

서면 한복판에서 교통사고가 있었다.

당시 교통사고가 났었던 그 근처 투석실에서 꽤나 오래 치료를 다닌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갔던 그 동네에서 옛 기억을 살려 건너가던 건널목에 갑자기 생긴 신호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신호등이 생겼구나. 빨간 불이네? 돌아가야겠다.’

그 순간 무언가에 부딪혀 정신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어? 뭐지? 이 상황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눈 감고 바닥에 누워있는데, 잠시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아, 오토바이에 부딪힌 거구나.’


“어머나. 이렇게 사람들 많이 보고 있는데 그냥 가는 거 봐. 아가씨 괜찮아요?”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년 전, 나는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뺑소니 가해자에 대한 원망이 일어나지 않았다. 수도를 겸하고 있어서였을까. 그 사람과 나와 전생의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갚은 거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겨우 정신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괜찮냐고 여쭤봐 주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뒤로 경찰서와 119를 각각 전화 걸어주고 계셨던 두 분, 찻길에 누워있던 내 위로 차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치며 교통정리해주고 계시는 분들, 때마침 휴일이라 운동하고 지나가다 교통사고 장면을 발견하고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주신 구급대원까지.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뺑소니 범이 잡히나 안 잡히나 당시 나는 상관이 없었다. 한 가지 걸렸던 건, 뺑소니 사고는 국가 의료보조금 없이 가해자가 잡히기 전까지 모든 치료비는 피해자 본인 부담이라고 한다. 장애로 등록되어 있어 의료혜택을 많이 받았던 나였지만, 이번 뺑소니 사고는 장애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가해자가 잡히지 않으면 그 어마어마한 치료비는 다 피해자인 내 몫이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런 피해자들을 위한 국가보장법이 생겼다고 한다. 가해자를 찾고 못 찾고를 떠나 국가에서 치료비 80프로를 지원해주는 법이 생겼다고 한다. 정말 난 운도 좋다.


이 사건 이후로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가해자는 찾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이 사건 담당자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나의 사건을 담당하신 경찰관께서 연락을 주셨다.

“김미니 씨,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나요? 지금 CCTV 돌려보면서 계속 찾고 있는데, 자물쇠에 번호판이 거의 다 가려져 있어서 번호판 식별도 어렵고, 이노 마이가 골목에 씨씨티비 없는데만 자꾸 도망 다녀가꼬요. 열심히 찾고는 있는데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잡히든 말든 상관없었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경찰관님,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저는 두 발 뻗고 잘 잡니다. 오히려 저를 치고 도망간 사람이 두 발 뻗고 못 자고 있겠지요. 저는 괜찮아요.”

내가 이레 이야기하니 듣고 있던 경찰관님이 오히려 화를 내며 말씀하셨다.

“그런 게 어딨습니꺼. 나쁜 놈 아닙니꺼. 잡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될 거 아닙니꺼. 미니 씨 몸도 아픈 사람이라면서요? 몸도 아픈 사람을 그레 치고 도망갔는데! 걱정 마이소. 내가 꼭 찾아가 죗값 받게 할 테니깐. 걱정 말고 치료 잘 받고 계 이소."


주변인들에게 상황 설명하니 3개월은 족히 걸릴 거라고 했다. 아 최소한 3개월은 걸리겠구나.

사고가 난 지 정확히 한 달.

담당 경찰관님으로부터 전화가 오셨다.

"가해자 잡았슴더. 합의를 하고 싶다카는데 경찰서로 와 보시겠습니꺼?"

한 달만에 가해자를 찾았단 소식에 담당 경찰관님이 엄청 신경 많이 써주셨단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서에 도착하니 같은 부서 경찰관들께서

" 저희 경장님, 번호판 식별하는데 김해까지 직접 찾아가서 빨리 찾아내라고 노발대발하시고, 이번 사건에 진짜 고생 많이 하셨어요."

역시나였다.

가해자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남자애였다. 그저 철없는 남자애가 겁이 나서 도망갔을 터, 어린 나이에 빨간 줄 끊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합의를 하기로 했다.

합의를 위해 만나기로 한 날. 그는 잠수를 탔다. 경찰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합의의 의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연락이 안 되니 그냥 검찰로 넘기겠다 하셔서 그러자고 동의했다. 이후 재판이 열릴 예정이니 참석하려면 오라는 검찰청의 문자를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그렇게 내 기억에서 그 사건은 잊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연락한 번 없었던 그의 어머니가 전화가 왔다. 그때 아들이 별 것 아니라고, 본인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엄마 걱정하지 마라며 진행상황을 일체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합의기간이었던 그때, 건널목을 건너다 음주 운전하던 차에 치여 폰도 깨지고 2개월 간 의식불명 상태였다고 한다. 최근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 경찰서 갔다가 바로 구치소에 수감이 되었다며, 면목없지만 합의를 해줄 수 있냐는 전화였다. 그렇게 그는 법의 심판 대신, 하늘의 심판을 받았다




우주의 진리는 공짜가 없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라고 한다. 뺑소니 교통사고가 난 건 내 것이겠지만, 나를 치고 도망간 건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억울함 없이 하늘의 심판을 온전히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당뇨라는 불편함만큼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배려를 참으로 많이 받았다. 나는 그런 배려를 온전히 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걸 당연하다 여기며 누렸다. 이게 잘못이었다. 세상이 보내준 배려를 온전히 내 것인냥 당연히 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배려의 고마움을 잊은 채 양심을 속인 그 체육시간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친구들이 이해해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쳤던 그 여자 친구는 이 사건 이후 나를 더 이상 친구처럼 대하지 않기 시작했다. 나에게 싫은 티를 대놓고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아무도 티 내지 않았던 선생님들의 배려와 상장 사건, 이 친구 눈에는 그 모든 게 가시였던 모양이었다. 반 친구들이 아무도 싫은 내색을 안보이니 잠자코 있다가 내가 좋은 먹을거리를 쥐어다 준 셈이었다.


그 친구의 행동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지만 죄인처럼 온전히 받아내며 지냈다. 그 친구와 유독 친했던 한 친구는 그렇게 우리 둘의 눈치를 보다 나와 대화하는 상황이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를 싫어하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그 친구의 눈치가 너무 보인 듯했다. 나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친구들이 단체로 나를 왕따 시켜도 내가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고맙게도 다른 친구들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켜줬다. 너무나도 고마웠다.




찹찹한 공기가 도는 계절이 왔다.

어김없이 찬 공기와 같이 나에게 감기가 왔다. 감기가 고통스러웠지만, 조연출이었던 나는 챙겨야 될 게 많았다.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병원에 가지 않았다. 조연출이라 시간이 없었다는 건 그냥 핑계에 불과했다. 아무도 병원에 못 가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병원을 집 드나들 듯했던 나라 병원 가는 게 싫었었나 보다. 감기 증상이 걱정됐던 친구들이 병원 다녀오라 했지만, 조연출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그렇게 길어진 감기는 나에게 천식이라는 친구를 데려왔다.


수업시간.

한 번 시작된 기침은 멈출 줄 몰랐다. 얼마나 기침이 심한가. 배 가죽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도 기침은 멈출 줄 몰랐다. 연극 연습으로 했던 발성의 크기만큼 기침 소리도 교실을 찢어 놓을 만큼 컸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 친구들에게 미안함도 커지고 있던 차였다.


"아휴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기침 나올 것 같으면 나가서 하든가."

여태껏 아무리 기분 나빠도 그저 참고 넘겼다. 그런데 천식으로 인한 고통도 서러운데, 이 말에 더 이상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지 않은가. 그 소리를 듣고 눈이 홱 돌았던 내가 그 친구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깜짝 놀라던 그 친구도 덩달아 내 머리를 쥐었다. 그 친구의 반응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아마 운동선수를 하면 잘했을 것이다. 싸움은 내가 먼저 걸었지만, 완패했다. 그 친구는 큰 키만큼 힘도 셌다. 우리 둘을 말리던 친구들 사이로 그 친구의 발길질 한방에 교실 바닥에 엎어지고는 싸움은 끝이 났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는 장면이 내 인생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너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싸움에서 졌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 쥐어뜯으며 헝클어진 머리, 발길질로 엉망이 된 교복, 증거는 충분했다. 그 길로 얼른 교무실로 갔다. 담임쌤은 언제나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셨다. 이번에도 내 편이 되어 주실 것 같았다. 담임쌤 앞에 앉아 울며 고자질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담임쌤은 내 편이 되어주시지 않으셨다.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억울한 마음을 고스란히 안은채 교실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1학년 9반이 싫어진 순간이었다.




이 사건이 나에게 상당히 큰 스트레스였나 보다. 이 날 이후 심해진 위통으로 밥을 먹지 못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처음으로 별로 기대되지 않는 시간이 되었다.

밥 먹으러 가자는 친구에게 다녀오라 하고, 책상에 엎어져 자는 나날이 지속됐다. 어느 날, 밥을 먹고 올라온 연극부 동기 친구가

"미니야, 죽있는데 죽 먹을래?" 라며 뜨끈한 보온 통에 담겨있던 호박죽을 그릇에 옮겨 담고 수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참 희한하다.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죽의 출처를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척 수저를 받아 들고 한 입 떠먹었다. 상당히 맛있었다. 죽을 챙겨 온 그 친구의 마음만큼 따뜻하고 맛이 좋았다. 나는 내 뒤통수에도 눈이 있는가 보다. 내손에 숟가락을 쥐어주며 죽을 떠먹는 내 앞에 앉아있는 친구가 내 뒤편에 앉아있던 그 친구와 묵음으로 대화하는 게 느껴졌다.

"죽 먹고 있나?"

"어 먹고 있다."

"잘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처박고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이 뒤로 이 친구와 더 이상 친해지지 못한 채 1학년이 끝이 났다. 1학년이 마무리될 때쯤 주고받았던 롤링페이퍼에 그 친구가 썼던 이글.


그때 당시에도 이 친구의 글이란 걸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상처가 너무 커 모른 척하고 싶었나 보다. 이후로 더 친해질 계기가 생기진 않았지만, 나와 친했던 연극부 선배와 이 친구는 오랫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했다. 언젠가 이 친구로부터 문자가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너무 미안했구, 다음에 밥 한번 먹자'

선배와 헤어지고 난 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 글이 마음에 박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며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친구가 갑자기 고마워진다. 나는 당시 반 친구들의 단체 따돌림을 받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중딩 때 밥을 즈그들끼리 먹겠다고 총대 매고 왔던 그 친구처럼, 이 친구가 반 친구들의 미움의 총대를 맨 것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친구가 너무 대놓고 싫은 티를 내서였을까. 더 이상 나를 미워하는 친구가 없었던 게 이 친구의 덕이 아니었을까. 아마 이 친구와 나와의 인연도 꽤나 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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