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줄어들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했다. 다른 친구들도 제마다 다 고민은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왜 남들처럼 건강한 몸으로, 남들이 다하는 평범한 고민을 가지지 못했을까? 무슨 죄가 많아서, 갚아야 하는 빚이 많아서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던 "착하다"란 소리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럼 죄가 많아서도 아닌 것 같았다. 이대로 늘 아픔에 고통스러워 살다가 죽어야 되는 게 나의 운명인가? 그러기엔 내가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그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분명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병으로 씨름 씨름 앓아다 죽어라고 태어난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자마자 큰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민희와 나영. 작명소를 찾아가 어떤 이름이 좋겠냐고 여쭈우니,
"이 아이 좀 많이 아플 겁니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아플 운명이었던 아이. 그게 내 운명이었던 거다. 나영이란 이름은 인생이 드세지지만, 민희라는 이름은 아프긴 해도 자기 일을 알아서 척척 해 나갈 거라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미니'가 되었다. 아픈 운명이라 해도 분명 이 세상에 도움이 될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태어났을 것이다. 분명히!
2학년이 되고, 연극부에서 또다시 학년장을 맡게 되었다. 3학년이 된 선배들은 수능과 졸업 준비로 바빠졌고, 자연히 모든 연극의 총대는 2학년 장인 나의 몫이 되었다. 그렇게 자연히 연극의 연출을 내가 맡게 되었다. 연출을 맡은 연극대회를 앞두고 일주일 전,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고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먹을게 생기면 위장을 넘어 목 구녕까지 차오르도록 먹어대던 내가 주둥이에 먹을 걸 넣지 않게 된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넘어가지도, 배가 고프지도, 그렇다고 무언가를 먹고 싶은 생각도 없이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연극 대회 당일이 되었다.
"오늘 대횐데 아무것도 못 먹고 우야노? 괜찮겠나?"
"괘안타. 내 가따오께. 다녀오겠습니다"
엄마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갑작스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어라? 배가 갑자기 왜 이렇게 고프지?'
일주일 만에 배고픔이 느껴졌다. 골목을 나오자마자 골목 끝에 있었던 자그마한 구멍가게로 들어가 카스테라와 우유를 사서 나왔다. 버스 타러 가는 길, 야무지게 카스테라를 우유에 촉촉이 녹여먹고는 걱정할 엄마에게 전활 걸었다.
"엄마, 내 골목 나오는데 배가 갑자기 고파서 빵이랑 우유 사묵으쓰요. 걱정 마이소. 잘 가따오께요."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연극 대회를 가는 딸이 엄마는 무척이나 걱정되었다고 한다. 늘 마음대로 막 먹는 게 걱정이었던 엄마가 안 먹어서 하는 걱정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셨을 것이다. 등교하는 나의 인사를 받은 엄마가 곧장 친정엄마(나의 외할머니)께 전화를 걸으셨다.
"엄마, 미니가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있다가 오늘 연극 대회한다고 갔는데, 걱정이 너무 돼서요. 우째야되겠슴꺼."
"미니야, 너희 조상님들 중에 니가 채려 준 밥을 먹고 싶은 조상이 있나 보던데. 이번 (음력) 9월 9일 제사 한번 모셔보는 게 어떻겠노."
예부터 우리의 뿌리인 조상 섬기기를 극진히 했던 효자 효녀가 많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풍습이 있다. 그게 바로 '중양절(重陽節)'이라는 풍습이 그것이다. 수리 중에 가장 큰 수가 2개인 음력 9월 9일. 한국에서의 이 날은 국화향이 가득한 가을 정취를 즐길 수 있는 잔칫날이자, 객사했거나 기일을 모르는 조상 또는 원혼(冤魂)을 기리는 날이기도 했다.
엄마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보라는 외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이번 9월 9일 제사를 모셔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이 바로 내가 골목을 빠져나와 배가 고파진 순간이었다.
이런 적도 있었다.
엄마가 공부를 모시러 도장에 가시는 날이었다. 밤새워 우리 두 남매가 먹을 반찬을 하시고 아침 일찍 도장을 향해 가시고 계시던 중이었다. 갑자기 구토가 일어나고 몸이 너무 힘들어지는 게 아닌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구토도 하고, 몸이 너무 힘들다."
"둘째 큰아빠한테 전화드려 놓을 테니까 큰아빠한테 전화하고 병원 가. 알았제?"라며 돌아온다는 말씀 없이 전화를 뚝 끊으셨다. 섭섭했다.
'딸내미가 아프다는데 이레 매몰차게 전화를 끊나?'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와 통화가 끝난 후, 몸이 멀쩡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큰아빠에게 전화를 걸지도, 병원에 가지도 않은 채 멀쩡히 보냈다. 가만 생각해보니, 엄마가 도장에 수도 공부 가실 때마다 내가 아픈 일이 생겼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귀신이란 게 있을 순 있겠구나.'
뭔지 모르게 엄마가 수도를 하지 못하게 나를 통해 엄마를 막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내 삶이 좌지우지될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상신이든, 귀신이든. 왜 나를 이토록 귀찮게 구는 건지. 왜 그게 나인지 궁금했다. 나는 왜 이토록 아픈 삶을 살아야 하며,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그 고민을 오래 하기에는 학교 생활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왜 계속 아픔에 시달려야 되는지 깊은 사색에 빠질 틈도 없이 고등학교 시절을 아주 재미지게 보냈다.
종종 크고 작은 사건이 있긴 했지만, 고등학교 3년 동안 받게 될 고통스러운 사건들은 1학년 때 액땜을 다 했나 보다. 그저 2학년부터는 친구들과 감정싸움 일어날 일도, 병원에서 정신 차리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만, 당뇨로 인한 입원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또한 별일이다. 늘 입원하는 일은 방학 때 일어났다. 등교가 필수인 학기 중엔 멀쩡하다가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방학이 되면 그렇게 입원실이 나를 불렀다. 억울할 법도 한데, 학교를 친구들과 놀러 다녔던 나는 억울한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도 없어지고, 간식을 사 먹는 행위에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정신과 육체가 일치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정신은 환자가 아닌 듯했지만, 내 육신은 그렇지 못했었나 보다.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첫 월경이 1-2년 정도 늦었다. 중2 때 나의 키는 고작 145cm에 불과했다. 난 이 당뇨라는 친구 덕에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가득 찬 무료 치료 홍보관을 어려서부터 참 많이 다녔다. 145cm로 땅을 기어 다니던 내가 아빠를 따라 척추교정치료 무료 홍보관을 같이 다니며 갑자기 키가 155cm로 훌쩍 클 수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고 홀짝홀짝 키가 아주 티끌만큼 크더니 결국 159.8cm로 마감했다. 아, 그 아쉬운 0.2cm. 그 아쉬운 0.2cm 덕에 키가 '160'이 안 되는 녀자가 되어 버렸다.
고등학교 입학 후, 나의 몸무게는 고작 39kg이었다. 엄마의 지인 소개로 따라다닌 알칼리수 무료 홍보관에 치료 다니며 그나마 8kg가 불어 조금 사람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성장은 그게 다였다. 사춘기 때 내 육신의 성장에 힘을 보태야 했던 성장호르몬은 나의 성장에 쓸 여력 없이 스트레스 해소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또래 친구들의 육신은 점점 여성화가 되어갔지만 내 육신은 중학생 여성의 육신에서 멈추고 말았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갑자기 얼굴이 씨뻘게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촌병, 촌년"이라 놀렸지만, 난 그 놀림 조차 즐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푸석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넓은 이마의 가족력에 얇아진 머리카락 덕에 황비홍 못지않은 태평양 같은 이마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육신이 힘들다고 소리치고 있는 줄은. 젊음이 좋은 줄도 몰랐다. 그 젊음 덕에 인슐린 주사에 의존하지 않고도 일상생활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그 어떤 것도 모른 채 하루속히 성인이 되기를 갈구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춘기 학생들도 그러하리라.
‘성인이 되면 내 맘대로 다할 수 있겠지? 빨리 성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재 나이 든 우리가 절대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젊음이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고 말이다.
성인이 되기 전,
이 첫 번째 기적으로 마무리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사춘기 젊음은 두 번째 고난의 예고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