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 부록]그냥 끄적여보는 연극부 추억 한 덩이

(에세이 한 꼬집) 연극부의 상처

by 광녀의 인생철학


고등학교 1학년, 연극 동아리에 입단과 동시에 선배들이 자주 하던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연극부는 가족이다."

뭣이 우리 입학 전 자기들끼리 사귀다 무슨 사건이라도 있었는가 보다. 입학과 동시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무척이나 강조하며 말했다.

"우리는 가족이다. 가족끼리 사귀는 거 아니다."

사귀는 거 대신 희한한 문화가 있었다. 양오빠, 양누나, 양동생을 맺는 문화가 사귀는 분위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연극부 활동 시작과 동시에 양남매가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다. 이건 뭐, 그냥 남녀로 관심 있으면 사귀자 대신 양동생 하자. 이런 건가?


나는 2학년 학년장 선배와 양오빠, 양동생 사이가 되었다. 그 선배와 나는 다른 양남매들처럼 남녀의 관심으로 양남매가 맺어진 건 아니었다. 2학년 학년장으로써 1학년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선배가 1학년장이 된 나에게 양동생 제안을 했다.


우리 동기는 생각보다 남자 선배들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다. 우리 동기에 손예진 닮은 친구, 홍은희 닮은 친구가 있었다. 아마 그 이유였던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남자 선배들이 관심 가지고 잘 챙겨주니 그저 좋았다. 남자 선배들과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남자 선배들과 양오빠 양동생 사이로 더 친해지니 여자 선배들과 친해질 겨를이 없었다.


1학년 장이었던 내가 우리 기수 모여서 회의 좀 하자고 모으면 제 때 모이는 법이 없었다. 학년장이 여자라서 그랬나. 내 말을 잘 따라주던 여자 동기 3명만 제때 모여줬다.

여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앞에 모여있는 여자 동기 3명을 앞두고 울그락 불그락 슬슬 얼굴에 열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는데, 때마침 남자 동기 하나가 다른 남자 동기들을 이끌고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온다. 난 다른 동기들이 왜 연극부에 들어왔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 동기는 연극엔 전혀 관심 없을 것 같았던 아이라 연극부에 왜 들어왔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 이유를 아주 먼 훗날, 개그맨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 동기는 내가 1학년 모임을 주최할 때마다 남자 동기를 모아주는 데에 엄청난 일조를 해주었다. 아니었다면 나의 스트레스가 또 엄청났을 것이다. 참 고마운 아이다. 그 덕에 1학기 생활은 무사히, 그리고 재미지게 잘 마무리되었다.




2학기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 선배들과 다녀온 무지개폭포 엠티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왜 여자 선배들은 많이 안 왔을까? 첫 연극부 엠티는 평소 잘 모였던 우리 여자 동기들과 남자 선배들이 주를 이루었다. 2학기가 된 이후에도 잘 챙겨주던 선배들과 늦게 까지 모여했던 연극 연습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를 친동생처럼 챙겨주던 남자 선배들이 갑자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가 냉대를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우리가 뭘 잘못했나? 갑자기 선배들이 왜 이레?'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우리는 이런 상황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기합을 주기도 하고, 단체 야단도 치고, 벌칙이라며 운동장 돌기를 시키기도 했다. 너무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점점 동기들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잘 모였던 여자 4명 외에 다른 여자 동기들은 아예 대놓고 연극부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남자 동기들도 슬슬 모임을 피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동기들이 다 떠나고 결국 여자 4명만 남았다. 남자 선배들이 왜 갑자기 그렇게 변했는지 영문도 모른 채 2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후배들이 연극부에 들어왔다. 한 기수 어렸던 후배들은 하나같이 참 착한 친구들이었다. 우리 5기 동기들의 말을 정말로 잘 따랐다. 그런데, 어라? 우리를 냉대하던 선배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다 걷어간 사랑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쏟아붓는 게 느껴졌다. 화나기 시작했다. 후배 중에 훗날 미스코리아가 된 후배도 있었다. 우리의 질투심은 극에 달했다. 선배들에 향한 원망과 질투심은 아무 잘못 없는 후배들에게 돌아갔다. 그냥 철없었던 우리에게 후배들은 그저 남자 선배들의 사랑을 뺏아간 존재일 뿐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친해질 수도 있었는데, 선배들이 망쳤다. 후배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챙겨주지 않아도 선배들이 알아서 잘 챙겨주니. 뭐 알아서 잘하겠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여자 동기들의 울분도 나날이 심해져갔다. 결국, 우리의 감정이 폭발에 이르기까지 했다.

"우리도 탈퇴하자. 그냥 연극부 5기 공중분해시켜 버리자."

나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기분 좋게 동아리 활동하러 들어와서 이런 스트레스에, 이런 대우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집에서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 좋다 했는데 또 이렇게 학교 동아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도 먹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어서 그랬는가. 발작증세가 재발하지 않은 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탈퇴하는 게 뭔가 께름칙했다. 탈퇴에 나도 같이 동의해놓고 슬그머니 얘기를 꺼냈다.

"그냥... 우리끼리 하자. 선배들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참 이 동기 3명, 참 내 말을 잘 따라준다. 방금 전, "우리도 탈퇴하자"라는 말에 동의하더니 이런 내 말에 또 그러자고 한다. 고마운 친구들.

그렇게 우리 5기는 공중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왕따 5기'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친남매처럼 지내다가 사이가 틀어진 남자 선배들과는 더 이상 예전 같은 사이가 되기 힘들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졸업한 남자 선배들이 우리 기수를 참말로 이뻐하고 많이 챙겨줬다.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철없는 고딩 여학생이다. 졸업한 남. 자. 선배들이 챙겨주니 또 연극부 활동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연극 발표회 기간이 되었다.

내가 조연출을 맡게 된 이 연극대회가 하필 창작극이다. 선배들은 창작극 대본을 우리에게 짜오라고 시켰다. 자칭 왕따 5기, 여자 넷이 머리를 맞대어 법규를 어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1차적으로 완성된 대본을 선배들에게 넘겼다.


안 그래도 미운 선배들이 완성된 대본을 보여줄 때마다 재미없다며 다시 써오라고 했다. 2차로 수정하고 다시 건넸다. 재미없다며 다시 퇴짜 맞았다. 다시 수정하고 제출했다. 여전히 재미없다며 다시 써 오라 했다.

이유라도 알면, 어디가 재미없는지 알려라도 준다면,

거기에 맞춰 수정이라도 하겠건만 이유도 안 말해준다. 미치고 활딱 뛸 심정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재미없다고 이렇게 퇴짜를 많이 맞았는가.

방금 책장에 보관되어 있던 대본을 꺼내 읽었다. 아, 지루하다. 대본이 언제 끝나나. 아… 이렇게 재미없을 줄은 몰랐다. 우리를 골탕 맥이려고 퇴짜 놓은 건 아닌 게 분명하다. 당시엔 우리를 미워했던 선배들이 우리를 맥이려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당연한 거 아닌가. 연극이라고는 모르는 초짜들한테 이런 걸 맡긴 선배들 잘못이다.


도저히 어떻게 풀어내야 될지 몰라 너무 막막했다. 어두컴컴해진 교실 구석에 우리끼리 처박혀 울고 있었다. 우연히 그 교실 앞을 지나가던 여자 선배들이 들어와 우리를 달래주었다.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고는 선뜻 도와준다고 한다. 하굣길 햄버거 가게에 쪼롬히 앉아 동기들과 여자 선배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본을 만들어나갔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우리가 써 내려간 대본은 결국 폐기 처분되었다. 여자 선배들과 머리 맞대고 만든 대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룬 대본으로 완성되어 갔다.



창작극, ‘뻐꾸기’.

다른 둥지에 알을 낳아 부화 후 가짜 어미의 보살핌을 받으며, 같은 둥우리에 있는 가짜 어미의 알과 새끼들을 밖으로 모두 떨어뜨리고 둥지를 점령하는 새.


그 뻐꾸기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 평소 아버지의 무관심에 여동생에게 화풀이하며 지내다가 본인의 친엄마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고 집을 떠나고자 하지만, 본인을 키워준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 느끼며 문제를 해결해가는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

방금 대본을 또 꺼내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 보았다. 끊을 수가 없다. 대본이 끝나는 순간까지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대본의 마지막 주인공의 독백을 다 읽어낸 후 감정에 사무친 눈물이 났다. 아, 명작이다. 우리 연극 동아리 여자 선배들은 천재임이 틀림없다.

남자 선배? 다 필요 없다. 잘 챙겨주다가 쉽사리 변심하는 남자 선배들보다 이렇게 챙겨주는 여자 선배들이 훨씬 좋았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여자 선배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늘 남자 선배들을 “선배~선배~”하며 쫓아다니던 우리가 “언니~언니~”라며 여자 선배들을 더 쫒아다니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후, 서먹했던 선배들과 오해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연극부 내에서, 남자 선배들이 우리를 너무 친하게 대하니깐 버릇없어지기 시작한다고 더 이상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그걸, 성인이 되어서야 알 게 됐다. 참 어이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 덕에 좋은 여자 선배들이 생겼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남자 재학생 선배들과 너무 끈끈해져 여자 선배들과 친해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없어져 내 인생엔 더 이상 스트레스받는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이렇게 동아리 내에서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도 매번 잘 견뎌냈다. 첫 번째 기적을 경험해서였을까.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도 그 감정을 길게 가져가지 않고 잘 마무리 지었다. 화가 치밀어올라 어쩔 줄 모르는 동기들도 나름 잘 토닥였다. 내가 학년장으로 있으면서 망친 기수라는 소리 듣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졸업 때까지 무사히 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름 잘 이끌어간 것 같아 뿌듯하다. 졸업 때까지 우리 4명은 끝까지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동아리 활동 중에 동기들의 잘못은 어김없이 나에게 꾸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꾸중하면 고치면 그만이니깐. 씩씩하게 "네!"라고 대답하고 늘 웃었다. 나를 혼내던 남자 선배들은 내가 여자이기에, 혹시나 상처 받거나 삐질까 봐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혼을 내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기는 내가 아마 처음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어이없어하다가도 웃는 나를 보며 따라 웃었다.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웃음인가 보다 내 웃음이. 머지않아 우리 5기는 졸업한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왕따 5기가 되었다.


그런데 오해 없길 바란다.

내 인생의 이 연극부는 현재 나의 ‘제2의 가족’이 되어있다. 그만큼 친하다는 이야기이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서로 간의 오해는 잘 풀린 후 아주 친한 오빠 동생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기수는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유일한 기수가 되었다. 연극 모임에서 우리 5기는 절대 빠질 수 없는 멤버라는 위치가 되었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 기수가 상처 받았던 한 사건만 다룬 것일 뿐이다.




# 광녀 에세이, <세 번째 기적의 기록 > 1편부터 보기 (클릭)


# 광녀 에세이 매거진 <세 번째 기적의 기록> 구독하러 가기

keyword
이전 12화열하나. 되돌릴 수 없는 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