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녀의 인생철학 Oct 18. 2021

열넷. 건강복 대신 운빨

두 번째 기적의 기록



나의 탄생과 동시에 엄마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화장을 안 하고 다니셔도 피부 미인이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고 하던 엄마가 내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면서 눈가에 기미와 주근깨가 생기기 시작했다. 젖을 떼기 위해 우유나 분유를 먹이면 다 토해냈다고 한다. 걸음마가 빨라 돌이 되기 전에 뛰어다녔던 내가 잠시만 한 눈 팔면 하루 종일 찾아다니기 바빠 눈을 딴 데 돌릴 틈이 없었다고 한다. 음력 생일로 치면 2살 터울이지만, 빠른 생일인 나로 인해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은 뱃속에서도, 태어나서도 울거나 떼쓴 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얌전했다고 한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사내 아이라 할 정도로 요란했던 나로 인해, 동생을 어떻게 보살피고 키웠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신다고 하시니 말 다했다.


나는 오장육부만 탈이 난 게 아니었다. 제 집 드나들듯 다녔던 곳이 치과였다. 부모님이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시던 유년시절, 그렇게 드나들던 치과를 성인이 된 후 치료를 위해 찾아간 적이 있었다. 원장님이 오셨다. 예전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하얗게 변한 백발과 얼굴에 듬섬듬섬 보이는 주름들. 반가움과 아쉬움의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반갑게 인사드리고 싶었지만, 왠지 못 알아보실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척하고 인사드렸다가 못 알아보시고 민망해하실까 봐 그냥 인사를 생략했다. 내 차트의 이름을 보시던 원장님께서

“어? 니 민희 아니가?”

먼저 알아봐 주셨다. 너무 반가웠다. 우와, 기억하시는구나. 아직 내 얼굴에 옛 모습이 있긴 한가보다.


이후에도 소아당뇨에 합병증까지. 태어나면서부터 현재까지 진짜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할 정도로 난 참 병마와 많이 싸우며 지냈다. 아직 세상의 어둠을 경험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부터 이렇게 혹독한 벌을 내리신 하늘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 원망의 마음이 커질수록 나에게 간질(뇌전증)이라는 더 혹독한 벌을 내리셨다. 그러나 나는 그 혹독한 벌로 인해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냈다. 늘 원망으로 가득했던 어두컴컴했던 삶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그 빛을 찾아내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그 과정은 지난 나의 에세이를 봐주길 바란다.) 당시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그게 벌이 아닌 하늘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그 혹독한 상황을 잘 견뎌내고 오는 상이 얼마나 큰지를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하늘은 나에게 건강복 대신 다른 복을 끊임없이 쏟아부어 주셨다. 솔직히… 다른 복 다 거둬가시고 건강복 하나 내려주셔도 좋았을 것 같긴 하지만, 하늘의 계획이 있을 것이니, 건강복 대신 내려주신 다른 복도 꿀맛이긴 했다. 그러고 보면, 진짜 하늘은 공평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난 참 ‘착하다.’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도무지 내가 왜 착한지 전혀 모르겠지만, 타인은 늘 나를 긍정적으로 봐줬다.


얼마 전,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를 내려가다 아주 똘망하게 생긴 안경 낀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지나가며 아주 밝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하고 지나갔다. 깜짝 놀란 내가 “어.. 어.. 안녀엉.”하고 인사를 했다. 아주 많이 봤던 장면이다.

 

유년시절.

구멍가게 운영하던 엄마와 수다를 떨기 위해 모여들던 동네 어르신들은 나를 보며 인사성 밝고 착하다며 늘 말씀하셨다. 그때의 나는 하루에 10번을 만나면 10번 다 처음 만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다녔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런 나에게 칭찬을 참 많이 해 주셨다.

그래, 어릴 땐 그랬다고 치자.

학교를 다니면서도 친구들은 나를 항상 “착하고 쪼맨한 미니”라고 불렀다. 친구들이 왜 나를 착하다고 해줬는지 알려주지 않아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투석받기 직전에 근무했던 호텔에서, 급성으로 투석을 시작함과 동시에 퇴사를 했다. 실업급여 신청해 줄 테니 서류받으러 오라는 팀장님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호텔의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타 부서 직원을 오랜만에 만났다.  “갑자기 일 그만뒀단 소리 듣고 진짜 놀랬어요. 건강 괜찮아요? 저희 부서 사람들이,

"해피 바이러스 건강 때문에 퇴사했다"면서 엄청 아쉬워했어요."라며 전해줬다. 나와 한 번도 같이 일한 적 없이 오가다 몇 번 마주치고 인사만 했던 다른 부서 사람들이 나를 ‘해피 바이러스’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퇴사를 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큰 복은 아니지만, 간간히 들리는 이런 복도 나쁘진 않았다.




대학 입학 후, 학번을 부여받았다. 학번은 ‘20040666’.

엥. 하필 악마의 숫자인 ‘6’이 하나도 아닌 3개?

지금이야 이 숫자 ‘6’이 악마의 숫자가 아닌 조상님을 뜻하는 숫자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당시 나는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숫자 ‘6’은 악마의 숫자라고 인지하고 있었다.

‘와, 악마의 숫자가 한 개도 아니고 3개나? 나 악마인가?’

라며 속으로 웃은 적이 있었다.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속으로 웃을 수 있었던 건 참으로 많이 들었던 ‘착하다’는 소리가 한몫했을 것 같다.

입학 후 머지않아 또 한 번 동기들로부터 ‘착하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 사건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기게 되었다.


3년의 기나긴 시간을 인문계고라는 감옥 아닌 감옥에서 탈출한 동기들과 3년간 주야장천 놀다 뒤늦게 공부에 눈 뜬 나와의 대학 생활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필수로 들어야 했던 전공과목 이외 교양과목은 학점 잘 주기로 유명한 과목으로 신청자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나의 교양 과목은 정말로 배워보고 싶었던 과목으로 신청했던 터라 우르르 몰려 교양 수업을 가던 동기들과는 달리 홀로 듣는 교양 과목이 많았다. 그중 우연히 과 동기들과 같이 신청하게 된 교양 과목이 있었다. 지겹도록 공부만 하다 온 친구들은 대낮부터 술에 취해 수업을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나는 같이 낮술을 먹어도 수업을 빠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시험기간이 되었다.

고등학교 3년간 단련시켜 온 벼락치기 단기 기억력이 발휘를 해야 할 시기가 왔다. 동기들이 낮술에 취해 거의 수업을 들으러 온 적이 없던 교양과목의 시험 기간이었다. 수업을 듣지 않았으니, 필기 노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름 필기한 요점을 A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요약했다. 같이 수업을 듣던 친한 여자 동기 2명에게 이거라도 보고 시험 쳐라며 한 부씩 나눠줬다. 시험에 들어갔다. 세상에나! 내가 요약했던 그 용지에서 시험문제가 거의 8-90%가 나온 것이 아닌가. 뭔가 그 여자 친구들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아주 가뿐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나왔다.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던 남자 동기들이 갑자기 우르르 나에게 몰려와 고마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야, 미니야. 진짜 고맙다. 니가 정리해 준거에서 문제 다 나왔드라. 대박. 진짜 고맙디.”

엥? 이건 또 무슨 일이람?

나는 남자 동기들에게 프린터를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정리했던 요약 프린터가 남자 동기들 손에 다 쥐어져 있었다. 내가 준 요점정리를 받은 여자 동기가 복사해서 다 나눠줬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좀 황당했다. 나는 그저 친한 여자 동기들만 챙겨줄 생각이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하던 남자 동기들을 따로 챙겨주지 않았단 생각에 무안함이라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미니야 미안, 니 허락 없이 내가 복사해줬디.”

“어, 괜찮다.”

이미 남자아이들에게 고맙단 소리를 듣고 난 이후였다. 내가 생각한 선행을 2명에게만 나눌 수 있었던 것을, 이 동기 덕에 선행을 배로 나눠줄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됐다는 마음이 들었다.


늘 1등을 놓치지 않는 여자 동기가 있었다. 노트 필기를 빌려달라 부탁하면, “본인 스스로 공부해서 잘 칠 생각을 해야지”라며 절대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등을 놓치지 않던 그 친구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남자 동기 한 명이 갑자기 나에게 한 마디를 하고 갔다.

“우리 과에서 미니 니가 제일 착한 것 같다.”

이 사건 이후였던 것 같다. 나는 과에서 착한 아이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전공과목의 시험날이었다.

세 과목의 시험이 있던 전 날, 밤새 졸린 눈을 비비며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겨우 두 과목의 벼락치기를 끝났다. 현재시간 5시 12분. 돌덩이 같은 눈을 겨겨우 끄집어 올리며, 두 과목은 마쳤지만 논술 형식의 전공과목의 공부를 하기 위한 이 돌덩이 같은 눈꺼풀을 끌어올릴 기운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 한 과목 망친다고 시험이 다 망치겠나. 될 대로 되라지 뭐.’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잤다.


논술 시험인 전공 시험을 위해 강의실로 갔다. 맘 놓고 퍼질러 자긴 했지만, 막상 시험시간이 다가오니 슬슬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걱정 근심 가득한 마음을 안고 강의실을 들어서니 똑같이 공부 안 하고 온 것 같은 남자 동기들이 맨 뒷자리에 자리 잡고 앉아 열심히 책상에 무늬를 새기고 있었다. 순간 ‘어. 나도 책상에 적을까?’

맨 뒷자리 비어있던 좌석에 착석했다.

수많은 분량 중에, 이 짧은 10분 안에, 뭘 써야 될까? 고민 고민하다 한 분량을 선택하고 나도 열심히 책상에 무늬를 새겨 넣고 있었다. 잠시 후 뒷 문으로 들어오면 여자 동기들이 남자 동기들의 행위를 보며

“직접 공부해서 칠 생각 안 하고 뭐 하는 거고!”라며 인상을 찌푸리며 강의실을 들어오고 있었다. 강의실을 들어오다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잠시 멈칫하던 여자 동기가 한 마디 날리고 지나갔다.

“어? 나도 할까?”

‘뭐지? 나도 똑같이 하고 있으면 같이 욕을 하고 가야지. 왜 내가 하는 거 보고 본인도 해야겠다 하는 거지? 내가 뭐라고.’

순간 열심히 무늬를 새기고 있는 내 모습이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에이, 이건 아니다. 공부 안 했으면 공부 안 한 대가를 치르자.’

미친 듯이 밀려오는 양심을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내 행위를 멈추고 책상에 새겨 넣은 무늬를 싹 지웠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험지가 나에게 넘어왔다. 세상에나.

그 많고 많은 시험 분량 중에 내가 책상에 적어 내려갔던 부분이 시험문제로 나왔다.

대애박.


나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공부법이 쓰기였다. 항상 손으로 써야만 외워지곤 했다. 시험 전, 10분. 그 10분간 책상에 써 내려가면서 시험공부가 된 셈이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뛸 정도로 희열감에 휩싸였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자 동기가 앞에서 남자 동기들이 적어 넘겨준 커닝 페이퍼를 손에 쥐었지만, 미친 듯이 뛰는 양심에 한 번을 쳐다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손에 쥔 커닝 페이퍼를 보지도, 그렇다고 쓰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여자 동기 옆에서 나는 아주 찢어질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1장을 가득 채워 넣고 나왔다.


세상은 진짜 공평한 건가. 이 공평한 복록은 누가 정해주는 것일까.

몸이 아플 땐 그렇게 하늘이 원망스럽다가도, 이런 복록을 누릴 때면 참 하늘이 감사할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열셋. 미니의 오징어 게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