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한 '맨드라미'로 글쓰기
관찰한 6화 맨드라미로 글을 씁니다.
맨드라미를 관찰하고 글을 써보기 위해 이리저리 더 자료를 찾아본다.
맨드라미 소재로 이야기 한편이 만들고 싶었다.
어느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내가 관찰한 것과 다른 내용이었다.
나는 하나의 꽃대에 핀 꽃이 여러개 뭉쳐서 맨드라미가 되는 줄 알았다.
유튜브 영상은 꽃 길이를 재는 영상이다.
꽃길이를 재는 것은 꽃이 하나라는 뜻인데... 뭔가 자료를 더 찾아야 하나. 아님 내 나름 상상으로 글을 써야 하나 고민이어서 더 찾아봤지만 더 자세하게 나온 영상이나 자료는 없었다.
나는 내가 본 것이 맞아도 상대편이 “이거야!”라고 외치면 정말 정확한 것 아닌 이상 상대를 따라 간다. 나중에 내 말이 맞아도 그런 경우에는 할 말이 없어진다.
지금도 그렇다.
꽃이 뭉친 것을 한번 더 들여다볼 생각을 안했을까? 마음 속으로 비도 오는데 이정도 봤으면 많이 봤다.라고 생각을 한 것도 같다.
나는 전체를 다 관찰했다고 할 수 없다. 객관성이 빠진 내가 보고싶은 것만 관찰했다.
내가 맨드라미를 관찰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간 기억이기도 하다.
내 기억이나 사진으로 내 생각을 적어야 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있게 써내려갔을 것이다.
‘이야기만들기 할것인데 맨드라미가 어떤 것이 사실인지 지금 중요해?’
‘응 중요해! 중요하지 않으면 관찰을 왜 했어!’
‘그 부분만 빼고 쓸까?’
‘그부분이 핵심이야.’
그냥 그 부분만 빼고 써 내려 갈까하다 그러려니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관찰을 내 즐거움, 나의 호기심이었나?
브런치 글을 쓰기위한 관찰이었나?
진정 일상의 호기심으로 하나라도 더 보고싶은 마음에 쳐다봤는지 나에게 자문한다.
훌륭한 미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단지 수사학의 기교라고 생각할 뿐, 그 미덕이 법칙의 ‘정점’임을 보지 못하고, 원칙에 쉽사리 반응하고 물드는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 곧, 신이 모든 국가와 도시 그리고 정치인과 부자와 시인들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주)
나는 맨드라미의 정점을 봤냐는 것이다.
아니 내가 관찰하는 모든 것들의 겉으로만 관찰하고
겉으로 관찰하는 그것조차 나는 내가 보고싶은 것만 봤다.
어째 정말~!!
잘 들여다 봐야 한다. 확고한 고정관념으로 꽃을 보고 있어도 꽃이 보이지 않는.
내 즐거움이든 브런치를 내기 위함이든 어쨌든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관찰을 했지만 관념에 싸여서 보는 것만 보는 눈으로 사물을 봤다.
진정 ‘정점’을 보려 노력하지 않았음이 들통나 버리는 순간이다.
주> 자기신뢰철학, 랄프왈도에머슨, 동서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