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게으름뱅이 혼자 있네...

사람이 지켜가야 할 도리

by 남재 이진주

세상인심이 참으로 야속하다는 요즘에 하 수상한 하루가 나에게도 다가왔다.

어느덧 가을은 왔지만 서로의 마음에는 이상한 기류만 흐를 뿐 단풍마저 들지 않았다.

시쳇말로 푸른 단풍구경 간다고 나서지만 이상기온 탓인지 푸른 단풍나무는 제대로 색을 내지 못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기도 한다.

황금빛 들판이던 평야에는 벼보다 콩이 더 많고 점점 게을러지는 농부들의 핑곗거리도 늘어만 간다.

오래전부터 일궈 왔던 농토는 이제 무엇을 심어야 하는지 농과 밭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 아이들의 마음 밭에는 무엇을 심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도덕과 윤리는 무한경쟁심리에 밀려나면서 인륜이 무너지고 인간성마저 실종되어가고 있다.

논에는 벼를 심어야 하고 밭에는 밭에 맞는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배웠다.

사람은 사람다운 도리를 심고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목을 심어 가꿔왔었다. 그 세월이 우리로서 세어보니 족히 500년을 넘은 듯하다.

세상 살기 참 좋다고 한다. 가진 자들은 물질이 넉넉하고 풍요로워서 글로벌한 즐기는 삶을 살겠다고 지구촌 곳곳으로 여행을 하기도 하고 각 나라를 다니며 경제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가진 게 없는 자는 하루하루가 힘든 시간들이 되기도 한다. 그 근간에는 분명 사람 사는 세상인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인정은 말라가는 극한 가뭄을 겪고 있는 듯하다.

사람의 도리와 예는 찾아보기 힘들고 가족과 혈연관계는 이미 사촌마저 무너져 버렸다. 친족의 범위는 이미 흐릿해진 흔적이고 그 한계를 논하는 것은 고로한 꼰대의 잔소리일 뿐이다.

물질만능 시대를 부르짖는 세대의 추구하는 가치는 부의 축적과 방해받지 않는 자유라고 한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고전이 되어버린 인간 본연의 도리는 중요하지 않고 극한 이기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이웃 간의 상부상조나 품앗이는 사전에서나 찾아볼 단어로 남게 되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이라는 형태는 점점 극단화되어 자기 가족만의 은밀함이 되어가고 있고 가정방문이나 집에 초대하는 일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우리는 멀지 않은 옛날이야기를 듣고 살았던 세대이고 유교문화와 바른생활 도덕을 배우고 살았던 세대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그 시대를 반영하듯 생활 형태가 변해왔고 삶의 형태에 따라 가치관이 변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움도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 바탕에는 사람은 동물과 다르다는 관념적 이념을 이어 왔기에 금수보다 못한 짓은 터부시 해 왔다.

그렇게 집안 어르신이 베갯머리에서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워지지 않은 소중한 보물처럼 마음에 담아두고 교훈으로 삼고 살아왔다.

나는 오늘 사랑하는 아이로부터 “늙은 게으름뱅이 혼자 있네.”라는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듯했다.

늙었다는 말은 자연스럽게 인정이 되나 게으름뱅이라는 말은 소름이 끼치게 했다.

성경 잠언서에는 유독 게으른 자에 대한 예기가 여러 번 소개된다. 이 아이에게 게으른 자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과연 그 의미를 알고 했던 이야기 일까?

아마도 소파에 편하게 누워있는 모습이 이아이에게는 그렇게 보였나 본다.

우리 때는 게으름뱅이는 어떤 욕보다 더한 수치심을 갖게 했었다.

나태하고 게으르다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서 자격이 없고 짐승처럼 여기게 된다는 교훈을 담아왔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전래동화로 한 번쯤은 들었을 <소가 된 게으름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줄거리를 조금 소개하자면 이렇다.

<옛날 옛적에 어느 작은 마을에 일하기 싫은 게으름뱅이가 있었다. 그는 장가를 가서 아내가 있었어도 게으름뱅이는 하루 종일 빈둥빈둥 놀기만 하였다.

어느 날 부지런히 일을 하던 아내가 보다 못해 어디라도 나가서 뭐라도 해보라며 남편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게으름뱅이는 하는 수 없이 집을 나와 이곳저곳으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보고는 저렇게 “소가 되어 여유롭게 살면 좋겠다”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이 소리를 듣게 된 지나가던 노인이 “소가 되게 해 줄까?” 물으니 게으름뱅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소 머리 모양의 탈을 건네어주면서 “이걸 한번 써 보게”했다

게으름뱅이는 별생각 없이 탈을 쓰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꼬리가 생기고 다리가 생기며 진짜 소처럼 변해 버렸다.

노인은 소가 된 게으름뱅이를 끌고 시장에 가서 어느 농부에게 팔아버렸다. 팔면서 이 소에게는 절대 무를 먹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는 농부의 손에 끌려가서 하루 종일 논을 갈고 밭을 가는 쟁기를 매고 일을 하며 고생고생 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지치도록 일을 하고 밤에는 차가운 외양간에서 지내며 신세를 한탄하며 슬퍼하며 훌쩍였다.

어느 날 무밭을 지나다가 절대 무를 먹이지 말라던 노인의 말이 생각나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하며 무 하나를 베어 먹게 되었다. 그러자 게으름뱅이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사람이 된 게으름뱅이는 자초지종을 농부에게 이야기하고 집으로 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탈을 줬던 노인은 찾을 수가 없었고 집으로 돌아온 게으름뱅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제 정말 열심히 살겠어.”라고 아내에게 맹세를 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게으르다>는 것은 나쁘다는 것으로 인식되며 부지런함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던 세대가 있었다. 나도 분명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다.

요즘은 일도 중요하지만 쉼도 중요하다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가치관의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청년이었을 때는 반공일이라는 토요일까지 일을 했으나 토요일도 휴일이 되었고 지금은 주 4일 근무 예기도 나오고 있으니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도 좋지만 자유롭게 즐기기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도 했다. “워라밸”이라는 용어가 쓰인 지도 몇 해가 지났다. 쉼과 게으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요즘 청년들의 삶은 소처럼 일한다는 개념은 이미 아닐 것이다.

농수산업이 주를 이루던 시대에서 과학과 IT의 시대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달라지는 사람들의 일의 형태는 확연하게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를 다함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나 자기만의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만 결국 세상은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자기의 삶이 타인과 비교하여 현격하게 뒤처져 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자기만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게으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아무도 게으름뱅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같을 것이다.

부지런함이 그 당시 시대적 가치였다면 지금의 가치는 창조적 삶을 위한 즐거움을 만들어 가는 것일 테니까..

벌써 나는 노인이 되어버렸다.

한 아이가 나를 보고 “늙은 게으름뱅이 하나 있네.”라는 말을 했을 때 그냥 흘려들을 수 있고 마음 상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내 깊은 곳에 상처로 다가왔다. 아무 말이나 생각 없이 던지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내심 걱정이 많기도 하다.

아직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반드시 지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아이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살아왔던 시절들에서는 게으름이란 단어는 극한의 수치스러움이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이나 나는 그 아이가 던진 말에 요동치는 상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아직 어린아이이니 이해는 하지만 그 아이가 미운 것이 아니라 게으름이라는 말이 나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너무나 싫었던 것이다.

나는 내 젊은 날을 정말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왔다. 가정을 지키고 부양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했었다.

오랜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쉬지 않았고 신세대처럼 <워라벨>을 실천하고 있다.

그동안 집중하지 못했던 서화는 물론 시와 수필을 쓰며 부지런함을 가치로 다시 정진하고 있다.

손자 손녀들을 반기며 사랑하게 되면서 나에게 또 하나의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내가 살아왔던 세대와 지금의 아이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적 다양성은 세대를 아우르지 못하는 계층이 생겼다는 것이 마음 아프게 느껴진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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