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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재 이진주 Jul 18. 2024

바람은 하루종일 불지 않았다.

고맙고 감사한 나의 젊은 날

“샘이 깊은 물은 끝없이 용솟음친다. 

그러기 때문에 밤낮을 쉬지 않고 흐를 수 있는 것이다.”는 고사가 생각이 난다. 

인생을 살다 보면 늘 똑같은 날은 없다.

언제나 어렵고 힘든 것만도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천 길 만 길 깊은 샘이라 생각한다.

늘 새로운 감정이 솟아나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부족한 듯하여도 모자라지 않고 결코 넘치지도 않는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생각지 않는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가 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극복될 희망이 있다는 긍정의 힘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소나기가 내려도 하루종일 똑같이 내리지 않고 아무리 심하게 부는 바람도 하루종일 불지는 않는다.

어느 누가 일생을 살면서 어렵거나 힘들지 않을 때가 한 번도 없었을까요.

인생을 살다 보면 고난과 역경을 한두 번 만나게 되지만 결국 끝이 있고 반전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견디며 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나는 오늘도 창 넓은 창가에 앉아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풍경이 아름다운 먼 산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게 된다. 차가운 바람이 창문에 부딛혀 미끄러 진다. 

그토록 시리던 나의 젊은 날의 바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에 극도로 비참한 삶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던 나의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부모님으로 부터 받은 유산은 오직 가난뿐이었다.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 보려고 다니던 신학대학교를 중단하고 돈을 벌어보겠다고 무작정 집을 떠나 나섰던 길에 하얀 눈만 하염없이 내렸다. 갈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던 차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작은 교회를 찾아갔다. 폭설에도 멀리 보이는 것은 교회십자가 첨탑이었다. 저녁이 되며 눈은 더욱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개척교회목사님은 내 예기를 들어주었고 금방 교회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데려가게 해 주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처음 간 곳은 작은 코티드샌드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이 공장은 주물공장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모래에 화학약품을 코팅하여 납품하는 공장이었다. 이공장에서 하루종일 모래를 기계 속에 퍼 넣는 삽질을 했다. 먼지가 많이 나는 일이었기에 매일 샤워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없어 지하수로 샤워를 하고 나면 머리카락에 금방 얼기도 했다. "어~흐!"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샤워를 마치고 회사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들어오면 턱까지 떨리던 고통을 잠시 피할 수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희망 없는 삶에서 나는 무기력한 청년의 한때를 보냈다. 또 다른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는데 교회첨탑을 만들어 설치하는 일이었다. 교회첨탐의 위치가 다 그렇듯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맨 꼭대기에 네온사인이 부착된 십자가를 세워 고정하는 일이었다. 2인 1조로 하는 작업이지만 허공에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앵글을 딛고 서서 십자가를 지지해 주는 일이었다. 겨울철에 눈발이 날리는 날엔 극한의 작업이기도 했다. 이때는 사람대접을 받기보다는 마룻보다 못한 노예처럼 참기 힘든 굴욕을 견디며 했던 일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나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힘든 일이 끝나니 다시 일을 찾아야 했다. 공사장에서 하루종일 모래와 벽돌을 지고 5층까지 오르내리는 일, 긴 소나무 장대를 매어 날라서 비계(발판)를 만들고 대롱대롱 매달렸던 일도 서슴지 않았다. 용접을 배우다 눈에 모래를 한 줌 넣어놓은 듯 아팠던 기억, 조립식 앵글을 배우다가 처참하게 짓밟힌 청춘을 생각하다 울기도 많이 했다. 지질히도 가난했던 나의 20대 후반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무한 도전이었으며 쓰라린 실패의 연속이었다. 생각 끝에 광고간판을 배움 없이 시도해 보았으나 변변찮은 결과로 상심하다 핫도그 장사도 했다. 당장 먹을거리가 없어도 그때는 마음으로 근심하며 좌절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내게도 밝은 태양이 비추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해지는 지난날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글썽여진다.

어느 날 좋은 사람을 만나고 내 삶은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 분은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 준 고마운 분이셨다. 드디어 나에게도 희망의 햇살이 비쳐오는 듯했다. 어느 날 브랜드구두가게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나의 노력이 인정받아 백화점 매장에서 점장을 맡겨 주었다. 처음으로 누려보는 호사였다.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비싼 브랜드 양복을 입고 하얀 와이셔츠에 브랜드 구두를 신었다. 나는 제법 폼이 나는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를 이해해 주는 여자와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평탄하기만 했던 나의 운도 점점 좋은 결과로 다가왔다. 나를 신뢰해 주고 후견자가 되어주었던 그분을 만나서 전혀 새로운 일에 다가설 수 있었다. 내게 이런 재능이 있었는지 몰랐다. 하게 된 일은 인쇄 기획디자인 일이었다. 나는 도안이라는 분야에서 일을 배우며 편집출판에 이르까지 발전시켜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그 분야에서 인정받게 되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었다. 대형신문사의 5단 광고를 필름 화하는 작업을 도맡아 했고 인새분야 전반에 걸쳐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가 인쇄산업의 중흥기였다고 생각한다.  앞이 캄캄했던 나에게는 오롯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하나로 의지하고 살아왔다. 가끔씩 작은 고난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믿음 안에서 성실한 하루를 살아가는 신앙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변화는 그런 경험치를 통해서 공기업 관련 일을 하게 되었다. 모든 일에서 나는 나보다는 남을 섬기고 배려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소통하는 습관, 상호존중하는 습관, 끊임없이 학습하는 습관을 내 삶의 가치로 삼고 존중과 배려, 신뢰와 섬김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작은 파고는 있었으나 23년간의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정년을 하게 되고 안정된 삶을 살아올 수 있었다. 

아득한 젊은 날의 눈물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던 비참함이 그렇게 오래 나에게 머물지 않았음에 감사하게 된다.


1986년 1월 7일 충남 대전에는 엄청난 눈이 내렸었다. 아마도 첫눈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된다.

얼마나 쌓였는지 차들은 작은 오르막도 다닐 수 없었고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기억이 난다.

가난했다면 이때쯤 나에게는 최고의 설움이요, 쫓기는 자에게 막다른 골목 같은 것이었다.

이날 나에게 하나님의 선물 같은 큰딸이 태어났다. 첫딸은 살림밑천이라 했던가.

대전의 허름한 조산원에서 건강하게 태어났고 지금까지 잘 자라주었다. 

두 딸 모두 좋은 사람이 생겨서 결혼도 하고 지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내게는 두 딸이 있는데 모두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어린 시절에 아빠노릇을 못했다는 죄책감이 내게 있기 때문이다.

나의 준비 안 된 아빠의 경제능력 때문에 풍족하게 지원해 주지는 못했다.

두 딸 모두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아름답게 핀 꽃처럼 사랑스러운 여인들이자 현명한 엄마가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귀한 첫째 딸의 생일을 맞았다. 아침 일찍 먼저 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딸 **아. 네가 태어나 내 딸이 되어 주어서 고맙고 감사하단다.”

“항상 긍정적인 삶을 통해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언제나 형통함으로 충만하고 태어난 날이 축복되기를 바란다. 사랑한다. 아빠가.”라고 보내며 작은 선물도 곁들였다.

조금 있으니 문자가 날아들었다.

“아빠, 낳아주시고 지금까지 보살펴 주셔서 감사해요. 늘 건강과 평안을 위해 기도할게요. 감사해요.”라고 답이 왔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자주 살가운 표현은 못하지만 이럴 때를 이용해서 조금은 길게 쓰고 싶었으나 그나마 줄인 것이다.

그처럼 나의 삶 가운데 가장 애틋하고 미안한 딸들에 대한 감정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늘 샘솟고 있다.


오늘만은 외롭지 않았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가끔씩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는 생각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풍경이 아름다운 찻집에 나는 앉아있다. 그곳은 곳곳에 눈이 하얗게 쌓인 곳도 있고 제법 쌀쌀한 계곡 바람이 불었다.

그늘 사이로 달려드는 따스한 햇볕이 있어서 감성이 일어나는 좋은 풍경이 되어 주었다.

이제는 찬바람이 불어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금방 그칠 테니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때문일까, 내 마음마저도 맑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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