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완산도서관 작가의 방에 나와 있다. 등뒤에 유리창을 통해 비치는 빛은 어스름한 저녁녘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행복”이란 단어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단어는 아니다. 아마도 영어권에서 사용되어 왔던 happines를 직역한 단어 일 것이다. 행복의 행(幸)은 운이 좋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행복이란 단어는 운과 관련된 인생의 복을 뜻한다고 했다. 행복은 운이 좋은 사람에게 복이 온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이 좋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아서 복을 누리고 살아가지만 사람은 늘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채울 수 없는 탐욕이라는 항아리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탐욕의 항아리에 무엇으로 채워야 진정한 만족감으로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일까. 반면 운도 없고 복도 없는 사람이지만 탐욕의 항아리를 멀리한 사람은 만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나에게 다가오는 행운과 복이 내 마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지라도 자기만족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탐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양권에서는 행복보다 한수 위인 쾌족(快足)이라는 단어가 있다. 쾌족이란 지금 불만족스럽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서도 마음이 상쾌해지고 만족스럽다고 자위할 수 있다면 비록 운이 없더라도 쾌족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질히 도 복이 없어”라고 해도 탐욕에 붙들리지 않는다면 마음이 상쾌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속에 근심거리가 있고 걱정거리가 있어도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마음이 상쾌해질 수 있고 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쾌족 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뜻을 성실하게 하고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고사에서는 이야기한다. 먼저 진실해야 하고 누구에게나 솔직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는 것이 쾌족일 것이다.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신의를 잃었을 때 슬프고 불행하다고 느낄 수 도 있다. 그러나 행복이 나에게 온다고 해서 마음이 늘 상쾌하고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음은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명예나 부귀와 관계없이 남과 비교하여 상실감을 갖지 않는다면 나름 마음이 상쾌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도 늘 탐욕스러운 마음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다정하게 다가오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게 된다. 그 나중은 탐욕이 가져다준 고통과 절망, 슬픔과 후회가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줄 것이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는 사람도 많고 근심스러운 일도 많은 세상이다. 누구나 복잡 다양한 세상살이에서 남의 마음을 얻고 싶고 상대를 의지해서 휴식을 누리고 싶고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만족을 하고 싶어 한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하고 쾌족 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사람들도 보게 된다. 사랑이 행복을 가져주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혹여 그런 사랑에 빠지면 한동안은 다른 아무것도 관심에 두지 않고 오직 그대뿐이다. 그런 그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아마도 80퍼센트는 불행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 나머지 20%는 행복했을까?. 나는 이문제에 대해 가식적인 행복이라고 단언하게 된다.
오늘도 행복 찾아서 사랑 찾아서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밀물이 밀려오는 모래사장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써놓았으나 금방 밀려오는 파도가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세상살이가 어찌 마음먹은 대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 지난한 세월에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오늘 하루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다짐도 작은 시련에 무너지고 만다. 언제나 어렵고 힘든 세상이라고 하지만 단 하루라도 맑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로움 울 잃지 않고 살기를 원하게 된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남에게 의지하는 인생에 머물지 말고 깨끗한 삶의 태도를 유지하여 행운이 나에게도 온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자.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려고 하니 몸도 아프고 마음의 연약함에 찔금 눈물이 난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도 굽어가는 허리로 한숨을 내뱉는 내 모습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도 그러하거늘 볼상사납게 세상적인 물질에 가장 많은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
노년이 되어보니 내가 행복해 할 수 있는 가족이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과 두 명의 사위, 그리고 다섯 명의 손자손녀가 있다. 내 인생의 계급장처럼 빛나는 평범한 미래를 나는 소망하고 있다. 잠시도 멈추지 못한 손자들의 에너지 넘치는 활동성에 나는 여전히 노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행복감을 느낀다. 하루하루 잘 자라줘서 고맙고 두 딸은 힘겨운 부모노릇에 직장생활까지 하느라 엄마, 아내, 딸, 이모의 역할과 사위 쪽으로 며느리, 숙모등 가족관계의 네트워크를 잘 감당해 주어 참 좋다. 그들 모두 지치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평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행복의 씨앗이다. 나 또한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 부양과 직계가족의 여러 가지 기념일까지 뿐만 아니라 아버지 9남매형제, 어머니 8남매 형제, 아내의 13남매, 나의 3남매형제자매들의 대소사까지 장손으로서 역할을 잘할 수 있어서 나는 행복으로 느끼고 있다.
살면서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늘 마음먹고 다짐했지만 실수투성이인 내 삶은 운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어찌 인생살이에서 행복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과연 행복은 무엇이라 정의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행복은 우주의 기운을 타고 마음의 평화로 시작된다고 본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행복도 자기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정신이 안정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인간의 특성은 감정의 물결을 타지 않고는 불행할 수 있기에 때론 우울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습득되는 어떠한 상황에서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행복은 육체적인 평화보다는 마음의 평화가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되게 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마음의 불안에서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살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나의 행복을 담보한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하는 수준의 행복일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행복을 느끼는 감정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행복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가끔씩 힘든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작은 어려운 사항은 마음 편히 받아들일 줄 안다. 우울감보다 행복감을 더 많이 경험하고 살았다. 그렇다고 마냥 좋을 수만 없었기에 잦은 스트레스에 시달려 보지 않았다고는 단언하지 않는다.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트레스는 반드시 상대성이 있고 이기주의적인 부분이 작용하기에 개별적인 대처법이 따르게 된다. 나는 가난이라는 불편함에 어려서부터 익숙해진 탓에 아무리 어려워도 견디고 이겨내는 내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남들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자책도 하고 있지만 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형제자매, 절친한 친구라도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지금에 와서 통속적인 행복이 아니라 나만이 느끼는 행복조건을 제시하고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나만의 행복을 느껴보기도 한다. 행복은 나눌 수는 없지만 보탤 수는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이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게 된다. 하지만 본인이 느끼는 행복은 자기에게 국한되기 때문에 자기만족의 것이다. 어쩔 때는 가식적인 행복으로 가면을 쓰고 표정 없는 미소로 슬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우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변사람들에게는 아무 일 없이 평온한 여유를 가지고 있는 가식적인 행복의 순간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성네트워크가 잘 정렬되어 유기적으로 순환하는 효과를 가지려면 때로는 가식적인 행복을 표현하고 행복 더하기를 필요로 하게 된다. 사랑에 빠졌다면 행복하기에 더욱 가식적일 수 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미리 챙겨주며 환심을 사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라도 그 내면에 감추어진 진심을 모른다면 잠시의 행복은 곧 불행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대다수가 가식적인 행복을 진짜인 듯 보여준다. 그 속에는 이룰 수 없는 행복의 허상으로 채우고 얼마나 가증한 가식을 감추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너를 다 알 수 없기에 사랑은 말로 한다고 해서 진심이 아니다. 행복은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융합하여 반응하게 하는 것이고 사랑은 상대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다. 환심을 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은 착각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것이다. 결국은 상처 투성가 되어 불쌍한 몰골로 나는 행복을 찾아 떠났다가 슬픔만 안고 돌아왔다고 할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가식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사랑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어리석은 인생의 흔들림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보다도 더욱 약한 사실에 절망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행복이란 객관적일 수 없고 다분히 주관적인 관점에 있기에 내가 정의하는 행복은 나만의 관점에서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미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행복해지는 것을 진정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들 좀 더 행복해지고 싶지 않겠는가
누구에게나 행복을 위해 자기 마음에 숨겨놓은 사연 하나쯤 없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