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위로를 위해 떠나는 여행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나 햇볕은 여전히 뜨겁게 내리쬐고 있다.
손주 녀석이 방학을 해서 우리 집에 맡기겠다는 딸의 이야기에 꼼짝없이 발목을 묶여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아침 일찍 영적 감성을 따라 떠나 볼 요량이었다.
올여름은 여느 때와 달리 매우 뜨거운 폭염으로 시작되어 오랫동안 이어지는 열대지방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에어컨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을 정도의 후덥지근하고 불쾌지수를 올리는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어느덧 8월이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본격적인 휴가철이 되었다.
전에는 휴가기간이 있어서 휴가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계획들을 세우기도 했으나 퇴직 이후에는 휴가는 사치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사정에 따라 휴가 계획을 세우고 외국으로 떠날 일정을 체크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신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꼭꼭 숨겨온 나만의 소중한 순간을 챙겨 물길이 있고 쉼과 위로가 있는 숲 속으로 난 길을 걸어 보고 싶었다.
늦었지만 차를 타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내 마음은 이미 저 푸른 산길을 창문을 내린 채 달리고 있었다.
하루를 살면서도 가슴속에 쌓여만 가는 응어리를 해소하지 못하고 늘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낮은 곳으로 무심히 흘러가는 물처럼 어디에서 머무는지도 모르면서 흘러가고 있다.
오래 묵어 시간이 먼저와 기다리는 쉼이 있는 곳 순창을 향해 차를 몰았다.
따가운 햇볕이 자꾸만 차창에 부딪혀 조금씩 차안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던 맛과 정이 빛바랜 깃발처럼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곳,
산수가 수려하여 고추장 마을이라는 또 하나의 네임 밸류를 장승처럼 새워놓은 곳이기도 하다.
고추장 맛처럼 잘 발효된 인심을 담아내는 식단이 발길을 이끄는 곳 순창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순창 초입에 가로질러있는 터널 같은 길을 지나면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예보가 맞기는 한 것 같다. 한참을 세차게 앞을 분간 못 할 정도로 쏟아부었다. 요즘 비는 매우 국지성이고 많은 양의 비가 특징이 있다.
요즘에 새로 등장한 단어가 “극한”이라는 단어다. 극한 폭우, 극한 폭염, 극한추위 등 예전보다 훨씬 강력한 피해를 가져다주는 자연의 이상기후는 많은 생명체들을 큰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가장 낮은 곳으로 무심히 흘러가는 선한 물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 오랜 세월의 이끼 옷을 입은 담장을 따라 골목길이 이어진 시장 모퉁이에 옛 맛 정취를 간신히 묻히고 있는 식당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점심을 먹었다. 옛 맛과 인심은 아니지만 그냥 상업적인 냄새가 더 짙은 식당에는 오래 묵은 시간이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만나기 어려운 옛날 향취가 묻어나는 찻집을 좋아한다. 서까래가 길쭉하게 다리를 뻗고 하얀 백회칠에 더욱 선명해 보이는 서까래가 정겨운 찻집을 찾게 된다. 그곳에는 현대적 미는 찾을 수 없지만 오랜 세월 이 집에서 살았을 것 같은 흔적은 이 집안의 덕목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빗길을 따라 운전을 하면서 한국적 풍경을 담고 있는 전통 고추장 마을을 들렀다. 매콤하고 담백한 고추의 맛을 담아놓은 커다란 항아리들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지나가는 바람조차 의미를 담아두는 곳처럼 오래되고 깊은 느낌을 주는 듯했다. 나는 이렇게 꿈결 같은 여정을 이어갔다.
누구에게나 고단하지 않은 삶은 없을 것이다.
하는 일이 없어도 산다는 것은 지치고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사랑채에 앉아서 차 한잔 두고 마음까지 풀어놓고 쉬고 싶다.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최성수의 노래 “동행”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숲길 산길을 지나 물소리 벼락 치는 폭포 밑에서 한동안 마음을 풀어놓고 서 있었다.
골목길 돌아 오래된 집 화단에 여름꽃인 보라색 도라지꽃이 예쁘게 피었다.
그 옆에는 한 송이 별을 닮은 꽃인 백 도라지가 피어있어 마음을 끌었다.
백도라지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들꽃 따라 걷는 길에서 바람 하나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날이다.
잠깐동안 쏟아진 빗줄기는 금세 강 허리를 휘감아 큰 소리 내며 달리고 있었다.
오래전에 이곳 강바닥에서 동자개 밤낚시를 했던 기억이 발길을 따라붙는다.
물살은 세차고 흙탕물로 양도 많아지는 섬진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오래전 기억을 따라 이름 석자만으로도 충분히 유명한 시인의 생가를 찾아 마당에 들어섰다. 섬진강 시인으로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시구를 남겨주신 그분은 어느새 머리에 하얀 이팝꽃을 이고 계셨다.
마당에 들어서니 회문당 이라고 유명한 서예가가 쓰신 현판이 한쪽으로 치우쳐 걸려있었다. 집은 깨끗한 기와를 이고 정갈하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잔디마당에 곡선으로 놓인 디딤돌이 가지런하여 시인의 마음을 닮았다. 섬진강에 불어온 오랜 세월 풍파를 막아서서 지금껏 버티고 있는 키 작은 늙은 돌담에 능소화가 늘어져 피어있었다. 담장 밖으로 하얀 참깨 꽃이 달달한 향기를 담장 너머로 던져 주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부지런한 주인이 사시는지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아 마루에 걸터앉아 섬진강 건너 앞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곳에 하루 정도 머물다 보면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에서 건져내는 멋진 시를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 아주 터를 잡으신 백발의 시인을 잠깐 볼 수 있었다. “주인 없는 집 마당을 허락 없이 밟았습니다.” 하며 목례를 하였더니 “괜찮습니다.”라고 짧게 대꾸하고 살림집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혹시나 차 한잔 주시려나 기다렸으나 나오시지 않아서 발길을 돌렸다. 마당을 나오는 데 앞집에 이웃이신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여기는 전주에서도 많이 오고 가끔씩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했다. 덧붙여 나더러 “사장님, 사장님 얼굴이 환하고 빛이 납니다. 멋진 사람이네요.”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기분이 나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 놀리는 말은 아닌 듯했다.
그분의 눈에 내가 그렇게 보였다니 어깨가 으쓱해지고 별로였던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비가 갠듯하더니 또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마을 앞 커다란 정자나무 밑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왔던 길을 돌아서 나왔다. 진안고원에서 흘러내린 섬진강에는 점점 흙탕물이 불어나고 있었다.
섬진강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 흐르는 물에 이야기를 싣고 꽃을 피우며 계절을 실어 나른다고 한다.
액자 하나만 있어도 다양한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섬진강을 뒤로하고 풀잎에 대롱대롱 달렸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따라 찻길을 정했다.
풀냄새가 더욱 짙게 피어나는 산길을 따라 정겨움이 묻어나는 시골 동네 앞길을 달려보았다. 잠시 창문을 열어도 되겠기에 에어컨을 끄고 자연 바람을 차 안에 가득 담아 보았다.
급한 내리막을 지나 질퍽한 시골길을 지나면서 고추밭에 쳐놓은 나이론 줄이 비바람을 견디게 해 주고 있었다.
오늘도 짧은 시간에 내리는 비는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엄청난 극한 폭우로 내렸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기왕이면 작고 소박한 것을 찾아 발길을 놓았다.
“꽃과 사람은 신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입니다.”
“크고 높고 많은 것을 열망할수록 작고 낮고 소박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위로인지”라는 어느 작가의 글귀가 생각났다.
대관절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비 갠 뒤 돋아나는 잡초 같은 존재일 뿐이다.
어둠이 내리고 초저녁 냇가에서 불어노는 시원한 바람에 그동안 잊고 살았던 별 하나를 찾았다. 저 별은 내가 어릴 적에 세었던 별 중의 하나일까?
감성 담을 마음하나 둘러매고 매일 또 새로운 길에 떠나고 싶다.
그러다 불쑥 떠날 용기가 없지만 나는 오늘도 맑은 향기 달콤한 이야기가 있는 미혹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