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골을 부추기지 않으며 아이를 바라보면 모든 아이가 행복하다
2008. 3월 유치원 부모교육 강의 자료를 정리하며 쓴 교사 일기를 수정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가지게 된 신념은 유아들은 스스로 자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 없다. 아이가 스스로 감당하고 헤쳐 나아갈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걱정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이미 사사로운 고찰로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애이해를 위해서는 교실에서만이 아니라 학교 전체의 분위기가 반편견적이어야 하듯 나아가 장애이해로 출발된 통합교육이 인간이해의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교실 상황에서 아무리 인간 이해도가 넓다 하더라도 가정이나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그 속에 포함된 성인들의 생각이 나만 이해 받으려는 편견에 치우쳐 있을 때는 장애이해 태도가 확산될 수 없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일반유아에게 장애유아를 돕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부정적 이해와 태도를 가지게 할 수 있다. 유아들은 장애친구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혼동하기 때문이다. 혼동하는 것은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어른도 통합된 상황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항상 고민하신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장애 이해라는 것은 반편견적인 요소가 해소되어야 가능한데 이해를 기본으로 하는 태도 변화는 인식, 감정, 태도의 총체적인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기사에 오르내리는 부정적 장애인식과 관련된 댓글은 인간이 가진 우월감과 열등감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신은 완벽한 실존이라는 평균의 함정에 갇혀 신중하지 못한 의견이다. 장애와 비장애는 우월과 열등으로 구분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면 장애학생 부모는 장애가 있는 자녀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 자녀도 함께 키우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장애인에 대한 낮은 인식으로 부모로써 절대하지 말아야 할 동반자살을 하는 경우는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편견의 댓글은 어린 시기에 가정이든 어린이집/유치원에서든 다양성을 이해하는 폭넓은 인간관을 자연스럽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구에 의하면 유아들의 경우 만 2.5세가 되면 전편견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추후 출처 추가). 장애에 대해 약간의 불편을 느끼는 것으로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 인식하면서 두려움이나 부정적 태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특히 3-5세 유아들은 시각, 청각, 정형외과적 손상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지적장애나 자폐성장애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보인다. 그리고 장애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수준은 최소한 4세경부터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한다. 그리고 유아들의 장애유아에 대한 편견적이거나 거부적인 태도의 근원은 각자 다른 '차이'에 다르게 반응하는 경향에 있다고 한다. 실제로 유아들은 4세경부터 차이를 아주 약간 인식한다. 3세 유아 중 차이를 빨리 인식하는 유아는 "00이는 말을 못하는 친구"라고 일찍 규정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 유아에게 부모가 선한 의도로 설명해 주신 것이지만 "00이는 말을 못하는 친구니까 잘 해주어라"로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 서로 다른 ‘차이’를 폭 넓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교출이 심한 아이는 '산책하기 좋아하는 친구', 나가기만 하면 뛰는 친구는 '달리기 잘하는 친구', 교실을 돌아다니는 친구는 '호기심 많은 친구'로, 음식을 좋아해서 너무 많이 먹으려는 아이는 '미식가'로 물만 보면 뛰어드는 친구는 '수영선수'로 말이다. 유아들은 후드티를 잡아 당겨 빨고 있는 지적장애가 있는 유아(지적장애는 설명을 위해서이고, 유아 입장에서는 친구)의 행동을 보면서 "00이 개그맨 같아요", 영어단어를 스스로 해득하여 받아쓰기가 가능한 자폐성장애유아(친구)에게 "00이는 영어 박사에요"라고 이해하듯 '유아기는 장애이해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 장애이해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차이'에 다르게 반응하는 경향은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장애유아부모로서 장애아만의 ‘차이’로 이해하고 있는지, 혹은 나는 비장애유아부모로서 일반유아의 기준에서 본 ‘차이’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 둘 모두가 ‘편견의 골’을 부추긴다. 다행히 요즘 개개인성을 중시하는 풍토는 독특함에도 '그냥 그런거에요' 라고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다.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젊은이들 사이에 이런 문화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학년 초에 일반유아 부모님들로부터 “장애아동의 부모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라는 매우 조심스러운 질문을 자주 받곧한다. 이와 반대로 통합된 장애유아 부모님들은 학년초에 꼭 한달 병앓이를 하신다. '올해 부모님들은 작년 엄마들하고 다른 것 같아요. 장애아동에 대한 이해가 안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하고 말이다. 그러다 한달이 지나면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형님과 동생하며 잘 지내시면서도, 처음 만날 때 왜 이렇게 서로 불편해 하는 걸까? 낯설은 소속감이 형성되기 전에는 지속된다. 그래서 학교의 문화는 중요하다. 어떤 조직이라도 서로 뭉치면서 누군가를 따돌리고 소외시키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면 결국 조직의 인화관계만이 아니라 조직 운영에 문제가 생긴다. 개인의 특성과 취향이 독특하거나 다르다는 이유로, 장애의 정도가 심하다는 이유로, 내 자녀와 장애 특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편을 가르는 조직 문화가 형성되어있다면 개인에게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한 개인을 소외시키고 적응을 어렵게 하는 조직문화는 결국 전체 조직 문화 와해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치원(학교)에는 아파트 부녀회장님/조기축구회 회장님같이 덕으로 모든 학부모님들을 품는 역할을 하는 왕언니/왕형도 필요하다.
오늘의 생각은 장애인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도 자녀를 키우는 같은 부모로서 교류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