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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자꾸 말대꾸를 해요

우리는 아는 만큼 가르친다

by 유진 박성민

얼마 전 초등학교 2학년생의 어머니와 담임교사의 상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머니와의 상담에서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아이의 말대꾸가 문제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죄송하지만 혹시 우리 아이가 말대꾸는 하는 경우가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냐고 담임교사에게 여쭈었더니, 사람을 색칠하는 시간에 얼굴에 살구색을 칠하라고 했는데, 아이가 사람들의 피부색이 다양하니 나는 검정색을 칠하면 안되냐고 ‘말대꾸’를 했다며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고 했단다.

아이의 질문에 말대꾸한다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보며 특수교사인 어머니는 공교육이 아닌 대안교육이나 국외 유학을 해야 하나 고민이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부군이 유학파이기도 하지만, 교육은 아이들의 열린 질문에 유연한 교육 환경이 필요하다는 고민이었다.


그 말대꾸 때문에, 사춘기 중학교 시절 노랑머리 염색을 못하게 하는 한국 학교를 떠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예전에 근무했던 동료 선배 교사의 자녀는 캐나다 고등학교에서 전교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시절 한국에 나와서 봉사를 하다가 지금은 우리나라 국립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질문이 많은 것은 유아기 발달의 특성이다.

4-5살부터 아이들은 “이거 뭐야? ”,“이건 왜 움직여?”, “왜 그래요?” 등 계속해서 질문을 한다. 아이가 끝도 없이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자연 발달이고, 부모/교사가 잘 설명해 주어서이다.

인지적 사고의 발달은 언어로 표현되기에, 질문이 많다는 것은 사고의 급속한 발달 과정이다.


1990년대 중반 교사 시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초등교사 미술 연수에서 그림의 형태를 그릴 때 연필로 그린 그림이 틀렸다고 계속해서 지우개로 지우지 않도록 저학년 때에는 틀린 그림은 없으니 그린 상태에서 언제든지 유연하게 이어서 그리거나 고쳐 그릴 수 있도록 지도하고, 가급적 네임펜을 주어 수정 없이 그리도록 지도하면 유용하다는 것, 어린 시기에 그림 지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바탕을 색칠하는 데 집중하는 것보다 형태를 그리는 데 집중하도록 흰색 도화지가 아닌 다양한 색지를 선택하여 그리도록 지도할 것, 크레파스의 색깔을 말할 때 인종의 차별적 관점의 ‘살색’이 아니라 ‘연한 주황색’, ‘살구색’ 등의 표현을 쓰라는 것을 배웠다. 이처럼 방학은 늘 나의 부족한 전문성을 채우는 자기 연찬의 기회였다.


마침 며칠 전 지인들과의 수목원 산책 도중 역시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것을 또 느꼈던 경험이 떠올랐다.

유아들을 인솔하는 선생님에게 유아가 나무가 심긴 바닥의 검은 흙을 보고 “똥이야”라고 계속 말하는데 선생님은 “그건 똥 아니고, 흙이야”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어쩜 저리도 동심을 몰라줄까 싶어 안타까웠다.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라는 동화책을 보면 다양한 동물의 똥 모양이 다르다는 것이 소개되어 있듯이, 질문을 한 유아에게 왜 똥처럼 보이는지, 어떤 똥 모양 같은지, 왜 똥이라고 생각했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통해 함께 구경하던 또래 유아들의 창발을 도울 수도 있었다.

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 순간 나는 또 훈수를 두고 싶었지만 참았다.


크레파스의 색이름이 세계시민교육의 관점에서 살구색으로 변화되었지만, 교사 중에 아직도 사람의 얼굴색을 살구색에 국한해서 색칠하라고 하는 선생님이 있다면 교사 양성 교육과정에 무엇이 잘못되어서일까? 색칠을 즐기는 시기도 7세가 되어야 가능한데 왜 그리 어린 시절부터 색칠을 시키는 걸까? 교사들이 발달의 과정을 몰라서일까? 나 역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그림 독서장에 이순신 책을 읽고 빡빡하게 소감을 적지 않아서 채워서 다시 써오라 해서 보완을 해가니, 그다음에는 이순신 장군 그림의 바탕색을 안칠했다고 바탕색을 칠해올 때까지 과제 완수 도장(참 잘했어요)을 안 찍어준 담임선생님의 반복된 요구에 아이가 독서에 잠시 흥미를 잃고 좌절했던 기억이 소환되었다.


어린 아이의 열린 질문이 '말대꾸'로 둔갑되지 않으려면

교사도 솔직하게 한계를 인정하고 어린 학생의 의견을 존중하여

"아 그렇네. 선생님이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알려주어 고마워" 라고 했다면

더 권위 있고 훌륭한 교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한 아이의 미래를 열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자 기회였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내내 마음이 아팠다.


미드가 아닌, 영드에서 자녀가 엄마보다 휴머노이드 인공지능 로봇 도우미를 선호하여 엄마가 서운한 마음에 아이에게 왜 엄마보다 도우미를 더 의지하는지 질문하자 자녀가 엄마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만, 인공지능 로봇 도우미는 일관되고 감정이 안정적이어서 더 좋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휴머노이드의 장단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점을 차치하고라도 충격적인 이 장면을 통해서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있어서 인간적일 수 있지만, 양육과 교육, 훈육(생활지도와 상담)에서 교육자, 부모, 어른이 어떠해야 하는지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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