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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 수의사 Apr 05. 2021

멧돼지 이야기

멧돼지와 한 마을에 산다면

동물원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야생동물 피해를 담당하는 시청 부서에서 과수원에 들어온 멧돼지를 포획해 달라고 전화가 왔다. 야생동물 수렵단에 소속된 포수에게 의뢰하지 않고 동물원 수의사에게 부탁한 것으로 보아 살려서 다른 곳에 풀어주려는 마음이 읽혀 응했다. 8월 복날의 과수원은 더위와 습기로 가득했고 마취 주사기를 입으로 부는 블로건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야생 멧돼지를 블로건의 사정거리에 두기 위해 두 시간을 옥수수밭을 기어 다녔다. 결국 마취 주사를 맞히는 데 성공했고 마취된 멧돼지를 해당 부서에 인계한 적이 있다.


그 후 다시 멧돼지를 만나게 되었다. 야생동물센터에서 올무에 걸린 멧돼지를 마취해달라고 의뢰가 온 것이다. 현장에 도착해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멧돼지는 성체 수컷으로 보였다. 위턱에 올무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고 흥분한 멧돼지는 올무를 반지름으로 원을 그리며 날뛰고 있었다. 내가 접근하자 멧돼지는 더 흥분했고 나무 뒤로 숨어가며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멧돼지가 잠시 멈칫할 때 블로건을 힘껏 불었고 엉덩이에 마취 주사기가 꽂혔다. 10분 정도 지나자 멧돼지는 약기운이 퍼져 땅에 드러누웠다. 멧돼지의 위턱을 올무가 세게 조이고 있었고, 조여진 위턱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위턱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멧돼지의 고통을 끝내주기 위해 구조센터 직원과 동행한 포수가 멧돼지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추수철에는 동물원 호랑이의 똥을 구할 수 있는지 농가로부터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멧돼지 때문이다. 천적인 호랑이의 똥을 밭에 뿌리면 혹시 멧돼지가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멧돼지는 현재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있다. 멧돼지가 도심을 헤집어 놓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는 영상을 뉴스에서도 간간히 볼 수 있다. 더구나 양돈산업에 타격을 주는 아프리카 돼지열병의 전파 매개체로 지목되어 발견된 멧돼지는 살아남기가 힘들다.


멧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주시청에서 주관하는 연구팀에 멧돼지를 주제로 참여하였다. 동물원 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멧돼지의 행동을 연구하여 농작물 피해를 줄이고 멧돼지도 살리고 싶었다. 직원 몇 명이 멧돼지에 대한 국가정책을 바꾸기는 힘들겠지만 공존의 가능성이라도 제시할 수 있다면 큰 성과였다.


우선 자문을 위해 멧돼지 연구자를 찾아보았다.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현재까지 멧돼지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는 국내 단 한 명이었다.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빈번하고, 멧돼지 사냥도 자주 이루어지고 있지만 멧돼지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피해 농가를 방문해 멧돼지에 의한 피해 사례를 파악해 보았다. 멧돼지도 의외로 가리는 작물이 있었다. 고구마, 옥수수는 좋아하지만 감자, 깨, 고추는 먹지 않았다. 별 효과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랑이 똥을 피해가 빈번한 고구마밭에 뿌렸다. 일주일 뒤 밭주인에게 연락해보니 똥을 뿌린 바로 다음 날 멧돼지가 고구마밭을 헤집어 놓았다고 했다. 그래도 후각이 발달한 멧돼지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호랑이 똥을 며칠은 의심할 줄 알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또 다른 농가를 방문하였다. 산에 인접한 곳에 옥수수밭이 있었는데, 고압의 전기가 순간적으로 흐르는 철책이 밭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태양열로 전기를 충전하는 이 철책은 이상기후로 계속되는 비와 흐린 날이 이어져 전기가 흐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둘러보니 옥수수들이 거의 땅에 쓰러져 있었다. 수컷 멧돼지는 혼자 와서 적당히 먹고 가지만, 새끼 딸린 암컷이 오면 옥수수밭 전체가 엉망이 된다고 한다. 새끼들에게 높이 달린 옥수수를 먹이기 위해 밭 전체를 굴러다니며 옥수숫대를 쓰러뜨린다는 것이다. 피해 입은 농민의 걱정 어린 한숨과는 별개로, 새끼들에게 옥수수를 먹이려 그 넓은 밭을 굴러 다녔을 어미 멧돼지를 상상하니 어미로서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농가 중에는 지원을 받아 피해방지 시설을 설치한 곳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소규모 농가는 나름의 자구책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울타리를 설치했다. 농가마다 울타리의 높이나 튼튼함이 달라 설치 후에도 멧돼지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결국 포수의 총이 해결책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멧돼지를 목격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본 적도 없는 존재를 박멸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멧돼지를 더 잘 알기 위해서 동물원에서 키워 보면 어떨까? 멧돼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출몰하는 지역에 심는 농작물을 달리하여 피해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멧돼지가 얼마나 높이 뛰고 깊이 팔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면 표준화된 피해방지용 울타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수 공존’이라는 연구팀의 이름처럼, 지역 동물원이 중심이 되어 고민해 본다면 사람과 멧돼지가 한마을에서 잘 지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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