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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 수의사 Apr 09. 2021

남극에서 보내는 편지

남극 세종기지 방문

“바다에 가지 않고 바다를 상상할 수 없다면 바다에 가서도 바다를 느낄 수 없다.”

혹한, 빙하, 펭귄, 고래, 물범... 남극에 오기 전부터 상상했던 이미지들이다. 2019년 11월, 펭귄들과 겨울을 보내기 위해 남극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 남극 세종기지의 창문을 통해 빙하와 유빙이 바다에 떠다니는 모습을 보지만 기상 모니터는 영하 1~2도를 유지하고 있다. 한낮에는 간혹 영상으로 올라가는데 바야흐로 남극의 여름이다.

우리가 펭귄을 연구하는 곳은 세종기지에서 걸어서 40분 거리에 있는 남극 특별보호구역 171번 나레브스키 포인트이다. 일명 펭귄 마을이라고 불린다. 남극의 여름은 펭귄의 번식기인데 바닷가 언덕에 몇 천 마리의 펭귄이 둥지를 튼 모습이 장관이다.

주로 보이는 펭귄 종은 턱에 모자 끈처럼 무늬가 있는 턱끈 펭귄, 부리에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 것 같은 젠투 펭귄이다. 균형을 잡기 위해 두 날개를 뒤로 펴고 뒤뚱거리는 모습이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러면서도 극한의 환경에서 새끼 양육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펭귄은 암수가 며칠씩 번갈아가면서 알을 품는데, 교대하고 바다로 나간 펭귄은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남극 바다의 풍부한 크릴새우를 배불리 먹고 돌아온다.

같이 와 있는 서울대 펭귄 모니터링팀에 의하면 최근 새끼들의 3분의 1 가량이 부화했다고 한다.

새끼를 기다리는 것은 어미들뿐만이 아니다. 자이언트 패트롤[giant patrol]이란 큰 새는 새끼 펭귄의 포식자로서 펭귄들의 둥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들의 알을 부화하고 있다. 자신의 새끼를 먹이기 위해서는 펭귄 새끼가 많이 태어나는 계절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도둑 갈매기는 아예 펭귄 둥지에서 같이 기거하다가 틈을 노려 알을 훔쳐 가기도 한다. 자연의 균형 감각이란 냉혹하지만 경이롭다.

펭귄 마을로 가는 길에 바다에서 고래가 물을 뿜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땅에는 몸무게 400㎏ 정도로 보이는 코끼리물범이 자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큰 덩치에 폐가 눌리지 않게 옆으로 누워서 자는데 다가가도 여전히 깨지 않는다.

우리 연구팀은 펭귄 행동 권위자 극지연구소 이원영 박사가 이끌고 있으며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뇌파 연구자 폴 앙투앙 리부렐 박사가 함께 하고 있다. 비행기로 30시간 넘게 날아온 설렘은 잠시였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주먹밥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눈보라와 강풍에 맞서며 밤까지 일하는 쉽지 않은 일정이지만 우리 팀 모두 세계 최초의 해양동물 뇌파 연구에 임한다는 자부심으로 함께 하고 있다.

남극에 도착한 후 당혹스러웠던 것은 입국 허가도 여권 도장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남극은 누구의 땅도 아니었다. 우리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남극 조약을 맺고 자율적으로 남극의 환경을 보호하고 있다. 우리 팀도 야외에서 먹은 컵라면 국물 한 방울까지도 기지로 회수해 온다.

기지에 오래 계셨던 분들이 말씀하시길 세종기지 앞바다의 빙하가 녹아 해마다 10m씩 멀어진다고 한다. 신문에서 본 남극 온난화는 호들갑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내일이면 남극을 떠난다. 2주 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과 조촐한 송별회를 했다. 빙하 조각들이 바다로부터 흘러와 기지 앞에 자주 놓인다. 주변부를 깨내고 가장 깨끗해 보이는 안쪽의 얼음을 꺼냈다. 우주의 시간으로 만들어진 얼음이라 그런지 신비한 푸른빛이 돌았다. 숙소 창문 밖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은 소주에 푸른색 얼음을 넣어 만든 빙하주 한잔에 우리의 이별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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