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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 수의사 Mar 22. 2021

얼룩말과 미니말

종이 다른 말들의 동거 생활

동물원에는 나이 많은 얼룩말 제니가 있었다. 대부분의 초식동물처럼 얼룩말도 무리를 이루는 동물이기에 홀로 있는 제니를 위해서 어린 암컷 하니를 들여왔다. 하니는 광주의 한 동물원에서 태어났고 세상에 나온 지 1년이 채 안된 새끼 얼룩말이었다. 낯선 곳에 온 어린 하니는 제니를 엄마로 여겼는지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야생동물은 같은 종이라도 새로운 개체가 접근하면 경계하게 마련이지만 처음부터 제니는 자기를 따르는 하니를 싫어하지 않았다.


제니는 만성 발굽질환을 가지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잘 지내다가 병이 재발하면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이 있어 다리를 절룩거렸다. 그런 날은 제니가 하니를 귀찮아했지만 하니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2016년 봄 하니가 왔고, 제니가 하늘로 간 2018년 겨울까지 두 얼룩말은 사이좋게 지냈다. 2018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날 대퇴골절의 후유증으로 제니는 안타깝게도 폐사하였다. 제니의 동물 자력 카드에 퇴원이라고 적었다. 늙고 병드는 생명이기에 동물원에서 가장 많은 퇴원 사유는 폐사다. 하니는 제니가 없어진 이후 2주 동안 울어댔다.


2019년 동물농장에 셔틀랜드 포니인 향미와 동백이가 들어왔다. 얼룩말의 반 정도 되는 작은 미니말들이었다. 그 사이 홀로 남겨진 하니는 제니 대신 사육사에 의존하게 되었고 사육사가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시간이면 그만큼 더 우울해 보였다. 얼룩말 하니는 겨울에는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좁은 내실에 갇혀 지낸다. 그런 이유로 하니가 청주동물원의 마지막 얼룩말이길 바랐지만 홀로 지내는 하니를 위해선 대책이 필요했다. 같은 말과인 향미와 동백이를 얼룩말사로 데려와 같이 키우기로 했다.



종과 크기가 달라 걱정도 됐지만 잘 어울릴 수 있다면 하니의 정신건강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동물농장에서 얼룩말사까지 오는 동안 향미와 동백이는 겁을 많이 냈다. 특히 빗물이 내려가는 수로를 덮은 철제 구조물을 건너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오는 길에 10개나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구조물을 건널 때마다 버티는 말들의 엉덩이를 밀며 겨우 데려와 얼룩말사에 넣었다.


한동안 말사 중간에 임시 울타리를 놓아 물리적인 접촉은 피하면서 서로 얼굴과 체취를 익히게 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얼마 뒤 막았던 중간 문을 열었다. 서로에게 큰 관심은 없어 보였지만 같이 사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얼룩말사는 운동장이 좁고 내실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 있어, 예전부터 얼룩말들이 발굽질환에 자주 시달렸던 장소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들이 뛰어다닐 수 있는 넓은 말사를 그리 멀리 않은 새로운 장소에 만들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얼룩말과 미니말이 먹이통 주변에서 서로를 밀치며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육사들과 상의한 끝에 새로운 말사에는 우선 하니를 데려가고 상황을 봐서 향미와 동백이를 합사 하기로 결정하였다. 하니는 진정제를 맞자 잠시 후 고개를 떨구었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새로운 말사로 데려갔다. 새 말사의 넓은 바닥에는 뜯어먹기 좋게 풀이 자라 있었다. 하니는 며칠 동안 평소 지급되는 건초에는 관심이 없었다.


바닥의 풀이 다 없어질 무렵의 새벽, 긴급전화가 왔다. 하니가 울타리를 넘었다는 것이었다. 차를 몰아 동물원에 도착했다. 야간 당직을 서고 있던 수의사는 하니가 멀리 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었다. 하니는 놀란 표정으로 동물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동물원 동물이 울타리 밖을 나오면 익숙지 않은 환경에 당황하여 스스로 부상을 입기도 한다. 또한 예민해진 동물이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일단 응급상황에 대비해서 진정제 주사를 준비해 놓고 하니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하니는 향미와 동백이가 있는 기존 얼룩말사를 들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뒤편에 내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두었으나 놀란 하니가 모퉁이를 돌아야 보이는 문을 찾기는 힘들어 보였다. 얼룩말사 울타리 한쪽에는 평소 쓰지 않은 녹슨 문이 있었다. 자물쇠도 녹이 슬어 열쇠로 열리지 않았다. 망치로 연거푸 내리치자 겨우 열렸다. 사육사 서넛이 하니를 열린 문으로 유도하자 용케 문을 발견하고 껑충 뛰어 들어갔다. 향미와 동백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하니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니는 익숙했던 얼룩말사에서 안정감을 찾아갔다.



지금도 하니가 새로운 말사를 왜 나왔는지 궁금하다. 맛있는 풀을 다 먹고 바깥에 다른 풀이 간절했을 수도 있고 마침 그날 주변 풀을 깎던 제초기 소리에 놀랐을지도 모르고 향미와 동백이와 같이 살던 익숙한 공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동물사 밖을 나온 하니는 자유로웠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동물원에는 동물원에서 태어난 하니처럼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동물들이 대부분이다. 시간이 흘러 하니가 하늘에 있는 제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향미, 동백이와 서로 의지하며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두려움 없이 살다 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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