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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 위버 Jul 28. 2023

영화 ‘다음 소희’를 보고

다음 소희는 없는 세상을 위하여


‘다음 소희’를 보았다. 전통적인 영화 공식을 기대했던 나는 영화가 왜 이렇게 끝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인 소희는 통신사 전화상담원으로 현장실습을 갔다. 소희는 세 번의 월급을 받은 후 자살을 한다. 회사는 왜 그런 문제 학생을 보냈냐며 학교 탓을 하고, 학교는 취업률 떨어지면 국가지원금이 삭감되는 현실 때문에 불공정한 근로계약서도 눈감아주었다고 고, 교육청은 정량적 평가로 지자체들을 비교하는 교육부 탓을 한다. 어른들은 아무도 그 아이의 자살의 근본적 원인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내 밥그릇만 보호하느라 급급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렇지 않은 어른이 한 사람 있다. 여자 형사 유진이다. 우리는 이 형사의 행적을 따라가며 이 사회의 현실을 직면하고 함께 분노를 느낀다. 바로 이것이었다.  영화가 바라는 것이.


우공이산! 유진의 분노, 시청자의 분노는 우공의 삽질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공이 한 명이 아니고 수십만이라면? 그렇다. 이 영화가 개봉되고 10만 명 이상이 이 영화를 보자 삽질의 효과가 나타났다. 늦장부리던 국회가 현장실습을 하는 고등학생들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이러닝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그때 들은 말. 우리 모두는 잠재적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그때 잠재적이라는 단어의 위력을 느꼈었는데 갑질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잠... 갑질 피해자다. 우리 모두 다음 소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근묵자흑. 갑질을 당한 사람이 갑질을 부릴 수 있으니까. 한두 가지 법이 갑질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은 을을 위한 법이 생기고 더 다양한 감시장치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사회 곳곳에서 우공들이 삽질을 해야 할 것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근무환경은 쓰레기통이고 약자를 착취하는 데는 감탄할 만큼 똑똑곳에서 일한다고 누구나 자살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소희는 날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날고자 푸드덕대던 아이였다. 날고 싶어 하는 사람은 곳곳에 도사린 현실의 벽을, 그 벽에 부딪쳐 죽은 사람, 그 벽에 부딪쳐 날개가 부러진 사람을 보면서 절망하게 된. 지상에 안주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그래서 소희는 절망 끝에 그 벽을 세차게 한번 들이받은 후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날개가 있다. 다만 나는 것을 지레 포기하고 왕따 안 당하고 붕괴하는 다리 위에 있지 않았던 것에 감사하라고 스스로 세뇌하며 살뿐이다. 왜 이렇게 겁쟁이가 됐을까? 성과주의에 물든 세상에 태어나 성과주의에 휘둘려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성과주의가 갑질의 도미노를 일으킨 큰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성과를 위해서 갑질을 잘하는 사람은 살아남고 못하는 사람은 도태되는 세상이니 어찌 겁쟁이가 되지 않고 버티겠는가? (갑질을 안 하고도 우수한 성과를 낸 분들은 탁월한 유전자에 감사해야  것이다.)


나는 “이생망”일망정 나의 손자손녀들이라도 날개를 펴고 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선 ‘다음 소희’를 보고 형사 유진(배두나) 공감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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