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을 편안한 상태로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한 숨을 쉬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뇌신경학자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코로 숨을 연달아 두 번 들이쉬고 입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라고 한다. 의식적으로 숨을 두 번 들이쉬는 것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 한숨과 똑같다. 숨을 두 번에 나누어 들이쉴 때는 폐에 공기를 가득 채워 최대한 부풀이고 많은 양의 이산화 탄소를 입으로 길게 내쉬어준다 이것을 1~3번 반복하면 자율신경 각성 수준을 순식간에 기본값으로 낮춰준다고 한다. 이 방법은 일상에서 때때로 불안감을 경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 즉 우리들에게 편안한 마음에 이르게 한다
한 숨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 이유와 과학적인 근거는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을 조절하는 뉴런들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제어할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나는 한숨을 자주 쉬는 아이였다. 지금처럼 미디어를 통해 과학적 지식을 알게 되어 일부러 쉬는 한숨이 아니라, 스트레스로 잔뜩 긴장된 몸이 스스로 이완하고자 저절로 나오는 한숨이었다. 한숨을 여러 번 쉬고나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다. 내가 한숨을 쉴때마다 엄마는 “ 아이~ 한숨 쉬지 말아야~~”라고 나를 채근했다. 한숨을 쉬면 한숨을 쉴 일이 생길수있다는 믿음에서 비롯한 불안과, 한 숨 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그랬을 것이다.
언제부터 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린 나이에서부터 시작한 한 숨 쉬기는 아마 내가 살기 위해서 시작된 것 같다. 엄마와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성인이 된 눈으로 바라보니 나의 부모님은 몸만 자란 미성숙한 어른이었다. 과거에는 결혼도 현재보다 훨씬 더 이른 나이에 하였으니 어쩌면 미성숙한 것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를 위로해본다.
이른 나이의 결혼 뿐 아니라, 엄마 아빠 모두 자상하고 안정된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적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불안정과 결핍이 정상 값인 환경에서 자란 두분 모두 불안정과 결핍이 기본값으로 설정된 상태로 부부가 되어 아이를 낳아 길렀다. 그들은 서로 사랑도 했겠지만, 서로를 상처주는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때론 의식적으로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보면 전쟁터에서 느끼는 것 과 같은 엄청난 레벨의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서로 상처를 주는 과정에서 나와 내 동생은 전쟁과 같은 상처와 아픔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노출되었다. 성인이라면 그 스트레스로부터 피하기 위해 어딘가로 피해버릴수도 있었겠지만, 어린아이들이 그것을 피해 도망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부모가 다치면 같이 다치고, 죽으면 같이 죽는 방법밖에 없다.
엄마 아빠의 싸움이 끝나고 조용해지면, 그때서야 내 몸은 상처받고 고장난 마음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어린 나이에도 한숨을 하루에도 몇번씩 길게 몰아쉬면서 나 스스로를 달래었나 보다. 그러나 엄마는 이내 내가 한숨 쉬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나는 한 숨을 쉬고 싶어하는 욕구조차도 거두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한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하여도 걱정하게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린 나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힘든 일은 엄마 아빠의 싸움이었는데 한숨 쉬는 것을 아무리 억지로라도 멈추어도 결국 두 분은 전쟁을 치루었다. 우리 가족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는데 한 숨쉬는 것을 멈춰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스스로 안정을 취하려는 것 조차 막아버리니 내 가슴은 점 점 더 답답해져 올 뿐이었다.
이제 겨우 5학년인 내 딸아이도 가끔 한 숨을 쉰다. 내가 어렸을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 아이도 나름의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이의 한숨 끝에 매달려있는 어렸고 작았던 내가 보인다.
나는 아이가 한숨을 쉴 때 그것을 말리기 보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어야 하는 때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싶다. 한숨을 쉬어도 괜찮은 아이, 그 숨을 알아봐 주는 어른이 곁에 있는 아이.
나는 그런 엄마로 남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