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은 세상은 어떤 곳인지를 무의식에 깊이 새기는 단단한 동판화이며 지침서이다. 마음에 깊이 새겨진 판화를 통해 아이는 세상을 다시 찍어낸다.안전하고 편안한 부모를 만나 안정적으로 자란 아이들은 세상은 안전하고 좋은 사람이 많다는 판화를 마음 깊이 새기고, 앞으로 자신이 만나게 될 세상과 사람들도 편안하고 안전하게 바라본다.그러나 오히려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이 위험과 위협으로 느껴지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은 위험하고 무서운 것들로 가득찬 두려움 그 자체이다. 만나는 사람들도 언젠가 나에게 해를 끼칠수 있는 잠재적 가해자이다.
나의 아빠와 엄마는 세상은 위험하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들이 난무하는 곳이라는 것을 나와 내 동생의 가슴에 판화로 새겼다. 그들은 매일 우리를 그들의 전쟁 한가운데 던져놓았다. 나와 내 동생을 볼모로 잡으며 니편 내 편으로 나누며 누구 편도 들수 없는 우리를 원망하기 까지 하였다. 경계성 인격 장애와 나르시시스트였던 아빠는 수시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우리 모두를 협박하였고 우리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살벌한 눈으로 말했다. 엄마는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아빠로 인해 생계를 책임지며 생기는 육체적 피로로 인해 힘들어하였다. 또한 알코올 중독인 아빠는 술을 마시면 잠을 자지 않고 폭력과 욕설로 엄마를 괴롭혔다. 엄마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우리에게 특히 딸인 나에게 전가하였다. 엄마는 알수없는 때에 갑자기 폭발하였고 평상시에는 짜증으로 일괄하였다. 엄마가 잠이 들었을때 혹시라도 시끄럽게 하여 잠이 깰까봐, 그래서 엄마가 화를 낼까봐 조마조마하며 까치발로 숨죽이면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거나 밖으로 나갔던 기억이 난다.
어느날인가 내동생은 서로 이놈 저놈 들어보지도 무슨 뜻인지도 모를 온갖 욕을 다하며 싸우는 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빌었다. “내가 이렇게 빌테니, 제발 싸우지 마세요. 제발 싸우지 말라구요” 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 무릎을 꿇면서 빌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대신 밤이면 눈을 꼭 감고 두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 했다. “제발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베개 잎이 눈물로 축축해지는 날들이 늘어났다.
어느순간 내안에 강박같은 것이 생겼다. 내가 뭔가를 잘못하거나 나쁜일을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일거수 일투족 바라보다가 내가 나쁜 마음을 먹기라도 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벌을 줄것 같았다. 그래서 혹시라도 어린 아이가 할법했던 못된 생각이 스치기라도 하면 바로 “하나님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착한아이가 될게요 ” 라고 용서를 빌었다.
그렇게 나는 도덕적으로 1%도 결함이 없기 위해 노력하였다. 내가 잘못하면 뭔가 나쁜일이
일어날것이라는 불안함으로 인해 완벽히 착하고 도덕교과서 같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것은 어린아이로써 나의 세상을 지키기 위한 할수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 도덕적 잣대는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내 세상을 지키기 위한 날카로운 칼과 같은 규칙과 도덕들은 나만을 향했고, 혹시라도 잘못한 일이 있으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나를 날카롭게 베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나를 검렬하고 혹독하게 비난하고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밀어넣었다. 그 기분 나쁜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실수하지 않도록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완벽하기 위해 몇번이든 다시 확인하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벼랑끝에 서있는 사람같았다.
신앙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빠같이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하며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묘사했다.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말하건대, 난 내 평생 한번도 하나님을 그렇게 느껴본적이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성경속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육체를 빌어 예수님으로 오셔서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셨다. 머리로는 그 사랑을 알고 있었고 큰 감사를 느꼈지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은 언제나 무서운 형벌자였다. 내가 잘하나 못하나, 혹시라도 잘못하며 바로 벌을 주는 그 무서운 분이 나의 하나님이었기에, 따뜻하고 다정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그 사람을 도저히 이해 할수가 없었다. 또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아바는 아빠란 뜻이다)라고 묘사된 성경내용을 보며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처럼 여길수 있다고 했다. 아빠라니.. 아빠는 나에게 악마같은 존재이며 내삶의 고통의 원천이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여지껏 단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수도 생각할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바로 얼마전 깊은 묵상과 대화를 통해, 내 마음속의 무서운 형벌자의 하나님은 내가 만들어낸 방어기제이며, 하나님에게 나의 부모를 투사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 깊고 깊은 심연같은 나의 무의식에 새겨진 위협적이고 위험한 부모의 판화는 하나님 조차 무서운 형벌을 주며 심판하는 감시자 하나님으로 새겨놓았다. 다정하고 사랑을 주며 안전감을 주는 부모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믿는 신도 그렇게 바라보고, 위험하고 벌을 주는 부모는 아이의 마음속에 자신과 같은 신을 창조한다.
이제서야.. 난 진짜 하나님을 바라 볼수 있게 되었다. 시편 56편 8절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을 진실로 믿게 되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흘렸던 모든 눈물을 하나님의 병에 담아 놓으시고 기억하시며 나를 혼내고 처벌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나를 안타까워하고 연민으로 사랑으로 바라보신다는것.나는 이제 그것을 믿는다. 차가운 금속판에 새겨졌던 두려운 세상은 이제는 따뜻한 하나님의 병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다
오랫동안 “아빠”라는 말을 사용할수 없는 나였다 그렇지만 며칠전 아빠.. 아빠 하나님.. 이라고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인지 다른 기도는 나오지 않고 내마음이 계속 아빠, 아빠 백번 천번 되풀이하며 하나님을 부른다. 육신의 아버지에게도 편히 아빠라고 부를수 없었고, 내가 믿는 하나님에게도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던 매일밤 눈물로 기도하며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던 아이는 이제서야 입이 터져 말을 할수 있게 된 것처럼 “아빠” 라는 말을 수없이 외쳐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