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다만 체험된다

삶에 관한 단상

by 무소의 뿔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정리하고자 시도했지만 그 무엇도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사랑을 완전히 포괄하지 못한다.


그리고 보통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깊게 들어가 보지 않았거나.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방향은 잘못되었다. 사랑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사랑과 나를 분리시킨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순간 나와 사랑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발생한다. 우리는 사랑을 외부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랑을 어딘가에서 구해야 할 '무엇', 알아내야 할 '무엇', 찾아서 얻어야 할 '무엇'으로 보는 순간 우리는 평생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이성적,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사랑은 다만 지금 이 순간 존재로써 체험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랑의 근원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모른 채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삶에 대하여 '왜 살아야 하는가?' 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어야 하듯이, 사랑 또한 '무엇이 사랑인가?' 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어떻게'라는 단어에 꽂힌 사람들은 '사랑의 정답'이나 '방법론'을 구하고자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좋은 것인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그렇게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랑, 심리학자나 연애 전문가가 말하는 사랑,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 등에 빠져 그것을 맹신한 채로 살아간다.


외부의 기준과 잣대에 기대어 세워진 신념과 가치관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쉽게 흔들리고 쉽게 무너진다.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에도 종류가 있고 차원이 나누어져 있지만, 처음부터 정답을 구하고자 하면 오히려 정답에서 멀어지게 된다. 덧셈 뺄셈을 모르는 채로 방정식을 풀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살고자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살아간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지금껏 다른 무언가에 의해, 또는 나 자신에 의해 덧칠되고 덧씌워지고 억압되고 외면해온 나의 근원에 닿아야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를 '수용한다'는 말과 같다.


나의 단점과 장점,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내가 억압해온 나의 욕망과 감정을 샅샅이 알아차리고 마주하고 인정할 때만이 우리는 우리를 온전히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수용된 자신은 이제 외부의 무언가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히던 것의 정체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한결 편해진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알게 되고, 온전히 수용하게 되면 우리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나 자신을 타인에게 투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나의 단점과 장점을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서 찾는다. 그렇게 타인에게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질투, 존경, 집착, 혐오, 동정, 연민 등을 느낀다. 내 마음에 맺힌 상想에 얽매여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나와 거울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하고,
그래야만 타인과 거울 또한 분리할 수 있다.

우리가 나 자신의 모든 모습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수용하고 사랑하게 된다면 타인을 내 마음의 상想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니 타인 또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나와 너의 구별이 의미 없어진다.

모든 인간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인간은 원하는 것이 있고, 때문에 모든 인간은 고통스럽다는 것. 너와 나의 고통의 근원은 결국 같은 하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타인은 나와 구별되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함께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는 동행자로 인식된다.

너와 나의 뿌리가 같다는 것은 타인에게 연민과 자비를 불러일으킨다. 너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르지 않고, 너의 기쁨과 나의 기쁨이 다르지 않다. 자연스럽게 너와 내가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고, 너와 내가 행복하기만을 바라게 된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가 비록 너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이 가진 마음의 상想에 얽매여 있는 이라는 것. 우리와 같은 육체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너와 같은 고통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성실히 따라간다면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개념이나 정의가 아니라 하나의 체험으로써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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