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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Mar 27. 2022

구두

낡은 구두는 버려진다.

  신발장 구석에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구두가 있다. 동고동락했던 정 때문에 버리지 못했다. 잊고 있었는데 정리하다 발견되었다. 그도 나를 잊고 있었을 게다. 처박아 놓고 거들떠보지 않은 지 수년이 지났으니 함께한 추억도, 지독한 발 냄새조차 잊었을 거다.

  구두를 처음 신은 건 첫 출근 날이다. 합격통지서에 출근 준비 사항도 함께 알려왔다. ‘감색 또는 검은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넥타이 착용, 검정 구두, 머리는 귀가 드러나게 단정한 복장을 착용할 것.’

  입을 기회가 없었고, 넉넉지 못해 양복 한 벌 없었다. 저렴하다는 동대문시장에서 양복을 맞췄다. 구두는 서울역 염천교 근처가 싸다고 하여 어머니와 함께 찾아갔다. 양화점에 진열된 구두는 밤색, 검은색 모양도 가지가지다. 가지런히 내민 구두코는 반질반질 윤기가 난다. 점원은 발이 날씬하게 보여 신입사원에게 제격이라며 끝이 뾰족한 구두를 추천한다. 어머니는 그 틈에도 아들 자랑이다. 

  “얘가 큰 회사에 취직됐어요. 출근 때 검정 구두 신으래요.” 목소리에 행복함이 묻어 있다. 운동화에 적응된 발가락은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 구두와는 상극인 듯하다. 쉽게 신어 지지 않을뿐더러 억지로 들어가도 조이고 뻣뻣하다. 처음이라 그렇지 신다 보면 발에 맞춰진단다. 이것저것 신어본 뒤, 끈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으로 결정했다. 점원은 귀한 딸 시집보내듯 융으로 광택을 다시 한번 손질하더니 부드러운 종이로 감싼다. 상호가 인쇄된 봉투에 담긴 구두를 받아 든 어머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첫 출근날, 어젯밤 미리 입어보고 걸어 둔 양복을 입었다. 넥타이도 당기기만 하면 맬 수 있도록 미리 매듭지어 준비해 두었었다.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넥타이가 목을 조이고, 양복은 움직일 때마다 간섭이다. 구두는 한술 더 뜬다. 조이고 꺾이지 않아 발에서 불이 난다. 매끄러운 구두코가 돌부리에 걸릴세라 어기적거린다. 

  모든 게 새롭다. 양복, 넥타이, 구두, 처음 만나게 될 사람들…. 긴장과 흥분이 교차한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발이 구두에 맞춰진 듯 편해졌다. 물집 생기고 조이던 구두도 나와한 몸이 되었다. 뛰면 같이 뛰고, 비가 오면 같이 맞았다. 출장도 함께 가고, 상갓집, 결혼식, 화장실에도 같이 간다. 십 리를 걸으면 십 리를, 백 리를 걸으면 백 리를 간데족족 놓치지 않고 따라온다.                                                         


  마루에 걸터앉아 벗어놓은 구두를 내려다봤다. 많이 상해있었다. 편하다고 신고 다닐 뿐 무관심했다. 반질반질 윤기 나던 구두코는 언제 광택을 잃었는지 알 수 없고. 돌부리에 차여 벗겨지고, 갈라져 만신창이가 되었다. 꺾이지 않을 듯 단단하고 반듯하던 모양새도 빗물에 젖고 이곳저곳 부딪쳐 쪼글쪼글 변했다. 밑창을 뒤집어 보곤 더욱 놀랐다. 워낙 강고하여 믿었던 녀석이라 더 충격적이다. 비스듬히 깎인 뒷굽은 한쪽으로 기울고 얇아졌다. 못이 드러나 금세라도 떨어질 듯 덜렁거린다. 따라다니며 한 겹 한 겹 깎여나가 이 지경이 된 거다. 성한 거라곤 얼마 전에 교체한 구두끈 두 가닥뿐이다. 

  처음부터 무관심했던 건 아니다. 처음 일이 년 동안은 광택을 살리느라 구두 약도 바르고 융을 빨아 물광을 내기도 했다. 간혹 구두닦이에게 오백 원을 주고 불광을 먹이며 아꼈었다. 편해지자 뒤꿈치를 꺾어 신고 함부로 대했다. 처음 아끼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귀한 줄도 고마운 줄도 몰랐다. 

  급한 마음에 구두약을 덕지덕지 바르고, 솔질도 했다. 조금 가려지는 듯하나 깊게 갈라지고 벗겨진 상처는 회복 불능이다. 포기하고 버리기엔 같이한 추억이 너무 많다. 내 몸을 싣고 삶을 함께한 분신이며 동반자였다.

  수선집에서 가장 튼튼한 굽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아저씨는 굽만 교체한다고 될 일이 아니란다. 버리고 새로 사란다. 미리 돌보지 않아 이 지경을 만든 거다.    

                                                     


  벗은 발을 바라봤다. 상처 난 곳 없이 말끔하다.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다녔는데 발만 멀쩡한 것이 미안했다. 구두가 아니었다면 상처 나고 부러져 못쓰게 된 건, 내 발이었을 거다. 상처 났다고 발을 버릴 수 없듯 낡았다고 버릴 수 없어 보관해 두었던 거다.

  언제부턴가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말이 싫어졌다. 집안 곳곳에 오래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이 쌓여있다. 버리지 못한다고 아내와 다투기도 했다. 요긴하게 쓰였던 물건인데 쓸모없다고 버리자니 내가 버려지는 것 같다. 젊을 때 희생한 모든 것이 버려지는 것 같은 허탈한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마음을 바꿔야겠다. 직장 다닐 때 나이 많은 선배들을 향해 후배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고 뒷담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새 구두를 위해 자리를 비워야겠다. 낡은 구두를 보면 주름살 늘어나고 피부 처지는 모습이 헌 구두 닮아가는 것 같아 싫기도 하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 모든 발자취를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고,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던 그를 버렸다. 언제나 단짝이었는데 버려지자 흩어졌다. 

  버리고 오는 길에 며느리 손을 잡고 가는 이웃 할머니를 만났다. 치매 와서 요양보호소 가는 중이란다. 할머니는 한 조각 기억이라도 붙잡으려는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쓰레기통 속 구두가 자꾸만 신경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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