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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Mar 16. 2022

뿌 뿌우우

우리에겐 유능한 징 재비가 없다.

  ‘뿌 뿌우우’ 뱃고동이 울린다. 바다에 해무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해무 끼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어부들은 시도 때도 없이 끼었다 걷히기를 반복하니 그러려니 한다. 이런 날이면 어선들은 목줄에 묶인 강아지처럼 계선주에 꼼짝없이 묶여있어야 했다. 덩달아 어부들도 공치는 날이다.

  해무는 빛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지독하다. 어부들이 어둠보다 해무를 더 무서워하는 이유다. 바다에 나갔다가 해무를 만나면 선장은 뱃머리에 경험 많은 징 재비를 세웠다. 걷힐 때까지 징소리를 울려야 한다. 지독한 해무라도 소리는 통과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징 재비는 어디서 징소리가 들려오는지 당나귀 귀를 하고 듣기도 해야 한다. 파도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오는 징소리를 구분하는 건 경험 많은 어부 담당이다. 조그마한 징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좌현 징소리 1회”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외침을 들은 선장은 배 속도를 줄이고 징 재비는 징을 강하고 빠르게 쳐댄다. 상대방도 징소리를 들으면 빠르게 쳐대 응답한다. 선장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무중신호(霧中信號)를 보내 안전하게 배를 운행할 리더십을 발휘한다.



  선박에 레이더가 장착되어 있어도 충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해상 충돌 예방규칙’이란 걸 정해 놓았다. 빛이나 뱃고동 소리를 이용한 안전항해 보조 수단이다. 해군 함정에 근무할 당시 이런 뱃고동 국제신호를 교육받았던 기억이 난다. 단음은 1초간 ‘뿌’, 장음은 5초간 ‘뿌우우’라며 어린이가 나팔소리 흉내 내듯 입으로 뱃고동 신호를 외웠었다.

  다른 선박과 마주할 때 우측통행은 ‘뿌’, 좌측통행은 ‘뿌, 뿌’. 우측 추월은 ‘뿌우우, 뿌우우, 뿌’. 좌측 추월은 ‘뿌우우, 뿌우우, 뿌, 뿌.’뱃고동을 울린다.

  이런 무중신호를 숙지하는 건 선박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안전과 직결된 일이다. 그래서 해사 관련 자격시험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해무 때문에 엔엘엘(NLL)을 넘어 월북할 번한 긴박한 상황에 부닥쳤던 적이 있다. 구십 년 오월 해군에서 지원해준 LCM이라 불리는 소형 상륙주정을 타고 서해 대청도에서 백령도로 건너가던 중이었다. 전쟁 시 탱크나 트럭을 연안으로 상륙시키는 주정은 탱크 한 대 싣는 정도다. 철로 만든 뚜껑 없는 직사각형 상자에 엔진만 부착한 형태다. 백령도로 향하던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쾌청했던 바다가 갑자기 짙은 해무로 덮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이슬비 같은 물방울이 섞인 지독한 해무였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운전하던 하사관은 방향을 잃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근거리 상륙주정이라 레이더도 없고 시각으로만 운행하는 소형 배였다. 항해 장비라곤 달랑 자이로 나침판 하나뿐이었다. 함께 탄 통신병이 휴대한 무전기가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다.

  방향을 모른 채 운행하다간 북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바다 한가운데서 정지했다. 그러자 주정은 물결 따라 뒤뚱대며 밀물 방향으로 떠밀리기 시작했다. 북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가랑비 섞인 해무로 머리에서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을 닦아내며 일행은 긴박한 의견이 오갔다. 엔엘엘 경계까지는 불과 십여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상황은 심각했다. 북한 고속정이 레이더로 확인하고 내려온다면 십여 분이면 우린 납북자가 될 처지다. 국가 안보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공직자 신분이 문제였다. 납북되면 신분을 어떻게 위장할 것이고. 심문에 대처해야 할까? 누군가가 고문에 살아남지 못할 거라 했다. 그럴 바엔 납북되기 전 바다로 뛰어내려 죽음을 택해야 하는 것 아닌지? 공포 수준의 대화가 오갔다.

  그때 북쪽으로 떠밀리는 우리를 참수리 고속정 레이더가 포착했다. 긴급 상황이 발령됐고 통신망으로 운행 방향을 지시했다. “개구리/여기는 독수리. 15도 전진.”, “알았다. 개구리.”를 반복하며 지시를 따랐다. 심 봉사가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고속정 지시에 의존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해무 속 깜깜이 항해를 계속했다. 삼십여 분 후 어렴풋이 백령도 용기포항 등대가 보였다. 이젠 살았다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갑판을 펄펄 뛰었다. 지나친 긴장에 헛웃음도 나오고, 목이 잠겨 말을 못 하는 동료도 있었다. 해무 속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한 고속정이 있었기 월북을 면했다.    

 


  언제부턴가 온 나라에 해무가 낀듯하다. 젊은이들은 길을 잃고, 소상공인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어떤 이는 살아날 희망이 없다며 자포자기다. 이럴 땐 ‘뿌우우-’ 길을 안내할 뱃고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해무를 뚫고 안전항해를 책임져야 할 선장은 적폐 탓만 할 뿐, 경험 많은 징 재비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 광장마다 서로 불을 밝히겠다고 촛불 들고 모여든다. 한편에선 촛불은 해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불을 끄겠다고 태극기를 흔들어 보지만 서로 부딪치기만 할 뿐 역부족이다. 안전항해를 인도할 징 재비 마저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내려오는 커다란 화물선이 ‘뿌우우, 뿌우우, 뿌, 뿌' 좌측으로 우리를 추월하겠다고 뱃고동을 울려댄다.


  해무보다 북 화물선이 우리를 덮쳐버리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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