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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Oct 10. 2022

하이델베르크에서 얻은 것

여행을 가지 않으면 그곳을 가슴에 담을  수 없다.

   인파가 북적거릴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는 이른 아침이라 한산했다. 고즈넉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하다. 그곳의 가을은 우리를 조용히 맞아주었다. 시가지의 정적을 깬 것 자전거 종소리다. 책가방 둘러멘 젊은이가 강의실 찾아가느라 우리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육백삼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우리나라나 미국의 대학과는 달리 캠퍼스가 없다. 시가지 이곳저곳에 강의실이 흩어져있어 학생들에게 자전거는 교과서만큼이나 중요한 필수품이란다.

  여유 부리던 조용한 시가지 여행은 자전거 종소리로 끝이 났다. 언덕 위를 바라보자 늦가을 낙엽이 감싸 안은 황토색 고성의 웅장한 자태가 우릴 유혹한다. 가을을 위해 지어진 듯 단풍과의 조화는 표현할 단어가 생각나질 않는다. 그냥 하이델베르크의 가을이다. 

  이곳을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진입로를 걸어 산책하듯 천천히 고성에 오르는 것과 성의 테라스에서 하이델베르크 시가지 전망을 감상하는 거다. 트램을 타고 오르는 방법이 있지만 산책하듯 걷기로 했다.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날만한 진입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천천히 오르며 가을을 가슴에 안아본다. 가을이 되기 전엔 하늘 바라보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길이다. 옆을 길게 튼 이브닝드레스 사이로 새하얀 다리가 살짝살짝 보이듯, 낙엽이 반쯤 떨어진 나무 틈 사이로 조금씩 코발트 빛 속살을 드러낸다. 

  성 입구 오른쪽에는 비교적 너른 공간이 있다. 잘 가꿔진 잔디밭 곳곳에 아름드리 굴참나무가 세월을 무시한 채 성을 지키고 있다. 경비병이 엄숙하게 곧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 너무나 꼿꼿하게 서 있어 몇 년 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지 물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곳저곳에서 추억을 남기느라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그사이 잠시 충격을 받았다. 낙엽 치우는 작업 인부의 모습이 우리와 너무 달랐다. 빗자루 대신 등에 짊어진 엔진 청소기로 낙엽을 빨아드리고 있었다. 보안경과 소음방지용 헤드셋을 착용하고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이른 아침마다 밤사이 떨어진 낙엽을 쓸어내느라 빗자루와 씨름하며 힘들어하는 우리 청사 관리원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와-” 탄성이 들리는 곳으로 갔다. 두 번째 감상 포인트인 테라스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구시가지 모습은 자연스레 탄성이 터져나 올 아름다움이다. ‘네카어 강’을 가로지르는 ‘카를데오도르’ 다리 건너 숲에 지어진 석조 건축물과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구시가지 건축물이 확연히 대조를 이루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다. 칸트와 헤겔이 사색에 잠겨 거닐었다는 골목길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테라스 바닥에는 덜 굳은 시멘트에 강아지가 발자국을 남긴 것처럼 선명한 사람 발자국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람둥이 발자국이란다. 성주가 잠시 성을 비운 사이 부인이 정부를 불러들여 밀회를 즐기던 중 성주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바람둥이 남자가 창문으로 뛰어내릴 때 생긴 자국이란다. 내 발 크기와 딱 맞았다. 

  성 이곳저곳엔 삼십 년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다.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기 위한 고성의 버팀은 쓸쓸한 가을의 아름다운 경관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지하에 설치된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참나무로 만든 와인 통은 온전히 남아 번창했던 시절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여행에서 돌아왔으나 아직 가을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가로수 낙엽은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그걸 쓸어 담으려 쫓아다니는 빗자루가 쉴 틈이 없다. 빗질하는 어깨가 힘든 듯 축 처져있다. 여행지에서 보았던 엔진 낙엽청소기에 대한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담당자에게 우리도 엔진 달린 청소기를 사주자고 했다. 잘 놀다 와서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비아냥거림도 들렸다. 두 달쯤 지나 등에 짊어지는 엔진 청소기가 들어왔다. 기계 한 대가 열 명 빗질보다 능률적이었다. 낙엽만 치워지는 것이 아니다. 제설작업에도 유용하게 쓰이고, 미화원들 휴식시간도 배로 늘어났다. 하이델베르크 여행에서 얻은 선물이다.   

 


  이번 일로 여행 가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거친 표현을 하는 이도 있다. 이 말은 여행(travel)이라는 영어단어 속에 숨어있다. 1780년대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 역마차를 타고 가는 데 일주일이 걸리는 고생길을 트라 베일(travail)이라 했단다. 

 고생 각오하며 돈과 시간을 소비하며 떠나는 여행. 거기에는 분명 투입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가이드들은 새로운 것들을 즐기고, 배우고, 먹어보는 것이 여행이라고 한다. 내가 여행을 가는 것은 그곳에 가지 않고서는 접할 수 없는 자연환경을 보기 위함이다. 어딘가 엔 빙하와 만년설이 덮여있고, 끝없는 사막이 펼쳐지기도 한다. 용암이 솟구치는 활화산도, 상상을 초월하는 협곡도 있다. 사진으론 느끼지 못하는 엄청난 놀라움과 희열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는 인간의 다양한 삶을 느낄 수 있다. 로마 유적을 보고 그 시대의 삶을 상상하고. 이집트 사막 한가운데 지어진 피라미드에 동원된 노예의 아픔을 나눠보기도 한다. 왕가의 계곡에 묻힌 람세스 2세의 삶을 추리해 보는 것도 여행의 맛이다. 종교박해를 피해 땅굴을 파서 4만여 명이 살았다는 터키 ‘데린쿠유’ 지하도시를 보면서 인간의 신앙에 대한 믿음의 끝이 어디일까? 상상도 해 본다. 고급 휴양지에서의 휴식보다 새로운 걸 경험하고 놀라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뉴욕보다 거친 모하비 사막을 건너고 끝없는 협곡이 이어지는 그랜드 캐니언이 있는 미 서부에 더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여행은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 같아 행복하고. 느리고 여유 있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생각을 바꾼 것이 가장 큰 얻음이다. 빈부와 상관없이 주어진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내 삶을 돌아보는 기회고 반성하는 시간이다. 여행을 통해 행복을 얻었다. 이번엔 어디에서 새로운 행복을 만나게 될지! 내년 봄 남프랑스 여행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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