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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Mar 31. 2022

명감나무 덩굴과 여선생

질긴 가시덩굴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덩굴 가시가 바짓가랑이를 잡아끈다. 질기고 날카로운 명감나무 가시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고얀 녀석임에도 추억 많은 덩굴이다. 조무래기들은 한여름 물놀이로 배고파지면 산으로 간다. 주렁주렁 명감나무 열매가 지천이다. 덜 익은 푸른 열매는 끈적거린 진액을 머금고 떫다. 청포도 송이 같이 탐스런 모양에 현혹되어 한 움큼 입에 문다. 어린 순도 꺾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명감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건 덜 익은 여름뿐이다. 가을이면 사과 익어가듯 붉어지나 억센 껍질 탓에 탐할 수 없다. 잎이 지고, 눈 내릴 때까지 끈질기게 남아 새들을 유혹한다.     


  명감나무 덩굴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담임으로 부임하신 백 선생님은 가을 명감 열매처럼 볼그스레한 얼굴이셨다. 고운 피부를 갖고 계신 선생님은 여리고 약해 보여 무서울 것 같지 않았다. 백 선생님을 제외하곤 검게 그을린 얼굴에 호랑이같이 무섭고 굵은 회초리를 들고 다니는 남자뿐이었다. 아름다운 건 그뿐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예쁜 목소리에 회초리보다는 분필을 휘-익던지는 모습은 아주 멋졌다.

  얼마 지나 미인 뒤에 숨은 악마를 발견했다. 여리고 순해 보인 건 겉모습뿐이었다. 숙제를 안 했던 날 손가락 굵기 대나무 뿌리 회초리를 손바닥으로 받아내야 했다. 어찌나 아리게 내리치는지! 한 번의 회초리로 손가락을 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날 이후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엉뚱한 자세로 시선을 피했다. 

  토요일 오후 종잡을 수 없는 선생님을 발견했다. 처음 부임할 때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교실 환경정리를 도와줄 수 있느냐고 했다. 친근한 말에 당황했다. 더욱 놀라운 건 선생님 도시락을 같이 먹자는 거였다. 도시락 뚜껑에 쌀밥을 듬뿍 덜어주고, 노란 반찬도 나누어 주었다. 처음 맛보는 보드랍고 노란 색이 선생님 닮은 반찬이었다. ‘계란말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아는 계란 요리는 소풍날 특별히 삶아 가거나, 뜨거운 밥에 노른자를 올려 왜간장 넣고 비벼 먹는 것이 전부였다. 계란말이를 만들 수 있는 선생님은 특별한 분이셨다. 그날 이후 두려운 존재에서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말썽꾸러기에게 칭찬과 회초리를 적절히 사용하며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방과 후에는 학습 부진한 친구를 도와주라며 스스로 모범을 보이도록 유도했다.

  선생님이 좋아지면서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져 방과 후 혼자 집에 가는 날이 많았다. 논길 지나 개울을 건너고 산을 넘는 십여 리 길은 지루했다. 길옆 목화밭에서 덜 익은 열매도 따 먹고, 푸른 줄기가 길게 솟아오른 무를 뽑아 먹으며 지루함을 달랬다. 선생님이 나를 인정해 준다는 생각에 콧노래도 나왔다. 선생님을 도와주느라 늦었다고 하면 어머니도 잘했다며 등을 토닥거렸다. 학교생활이 즐겁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학교를 오가는 ‘한솔 재’에는 명감나무 덩굴이 많았다. 가을이면 빨간 열매가 대여섯 개씩 뭉쳐 줄기에 달려있는 것이 예뻤다. 교실에 장식해 놓으면 선생님이 좋아할 것 같았다. 줄기가 어찌나 질기고 가시가 많은지 손 등은 가시에 찔려 피가 났다. 아픈 것도 칭찬받을 것을 생각하면 신이 났다. 뾰족한 돌을 이용해 탐스런 줄기 두 개를 잘라 학교로 되돌아갔다. 방과 후 텅 빈 교실에서 명감나무줄기를 뒷면 게시판에 장식할 생각이다. 키가 작아 책상을 옮겨가며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게시판 양쪽에 아치형으로 장식을 마쳤다. 내일 아침 선생님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생각하니 배고픔도 사라졌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학년을 마치고 전근을 가셨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마 전 친구에게서 선생님과 연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십 년 만의 소식이다. 정년 퇴임 후 교사생활 경험을 책으로 출간하셨다는 것과 우리를 만나보고 싶다는 소식까지 전해 주었다.

  어떻게 변하셨을까? 우리를 어떤 제자로 기억에 남았을까 궁금증이 겹쳐온다. 만나면 첫인사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 선생님과의 추억을 짧은 글로 요약해 인사를 대신해 읽어 드려야겠다. 어릴 적 기쁨을 주셨던 것처럼 나도 선생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다. 오십 송이 장미 꽃다발에 빨간 열매가 달린 명감나무줄기로 장식한 꽃다발을 선생님께 안겨드렸다. 선생님은 교실 뒤편 게시판을 장식했던 명감나무 덩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주름 잡힌 눈가가 촉촉해졌다. 우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추억의 순간순간을 기억해 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돌아오는 내내 처음 만났던 젊은 날의 선생님 얼굴이 차창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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