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백이
용천백이는 어린이 간을 빼먹어야 병을 고친다고 했다.
오십 년 만에 초등학교를 찾았다. 전교생이 수십 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로 축소되었으나 정문에 있는 다복 소나무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소나무 밑에 앉아 한솔 재를 바라보았다. 공포에 떨며 넘어 다녔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한솔 재는 읍내 반대 방향인 관창리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산등성이 고갯길이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어 그리 불렀다. 학교에 가거나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으면 한솔 재를 넘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한솔 재를 넘어 호적을 얻었고 글을 배웠다.
학교에 가는 날은 한솔 재 넘을 일이 걱정이다. 아침밥은 쑤셔 넣듯 빨리 먹어야 했다. 책보를 어깨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대각선으로 단단히 묶어 멘다. 늦을까 검정 고무신 한쪽을 발에 넣는 동시에 한쪽은 질질 끌며 사립문을 뛰어나간다. 상엿집 앞에서 모여 함께 가는 친구들을 놓칠까 걱정돼서다. 용천백이가 나타난다는 한솔 재를 무사히 넘으려면 함께 가야 한다. 혼자 재를 넘다 그에게 잡히는 날엔 간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십여 리를 걸어 학교에 가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나 용천백이를 피하는 것이 관건이다.
실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고 소문만 무성했다. 그런 소문을 아버지께 말해봤자 쓸데없는 얘기라며 무시할 뿐 공포는 우리만의 것이었다.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감이 있었다.
문둥병에 걸려 집에서 쫓겨나 산속 어딘가에 움막을 짓고 혼자 산다고 했다. 눈은 한쪽만 있는 외눈박이고, 손가락은 썩어 문드러졌고, 발가락에서 피고름이 흐르는 흉측한 모습이라 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아 미라 같다고 실제 본 것처럼 소문이 돌았다. 김 부자네 머슴 아들이라고도 했다. 그는 산에 숨었다가 어린애만 잡아간단다. 어린이 간을 빼먹어야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여자애들이 더 겁을 먹었다. 개구쟁이였던 난 무서움에 떨고 있는 여자애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한솔 재 넘을 때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것이 좋았다. 어미 닭이 병아리 데리고 가는 것처럼 앞에서 인솔했다. 개한테 쫓길 때 대항할 힘이 없는 어미 닭 같은 존재이긴 하나 겉으론 강한 척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허풍 떨었다. “아무 걱정 마. 용천백이가 나타나면 내가 물리칠게. 내 뒤 바짝 따라와.” 여자들은 힘없는 어미 닭인 줄 알지만, 병아리보다 강하리라 믿고 따라왔다.
한솔 재 입구에 다다르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큰소리쳤을 뿐 뒤에 따라오는 여자애들 챙길 처지가 아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기까지 했다. 도둑고양이 지나가듯 살금살금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좌우를 살피며 달아나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 머릿속은 복잡했다. 진짜 나타나면 어떡해야 할까. 만화책에서 보았던 것처럼 여자애들을 지휘해서 돌을 주워 동시에 던져야 할까, 나뭇가지를 꺾어 공격해야 할까. 무슨 방법이든 보호해야겠다는 생각과 무서움이 혼재된 사이 한솔 재를 넘었다.
“에이! 그놈이 나타나면 양발 차기로 공격하려 했는데.” 허풍을 떨었다.
등하교 길이 아니라도 한솔 재를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초여름이면 송충이 잡이, 가을이면 솔방울을 채취하러 선생님 따라 한솔 재에 올랐다. 시멘트 부대 종이로 만든 봉투 하나씩 들고 솔방울 채취하러 나섰다. 솔방울을 주우면서도 불안해 주위를 살폈다. 선생님 곁에 최대한 가깝게 움직였다. 땅에 떨어진 솔방울을 줍기도 하고, 단단히 붙어있는 생 솔방울을 따기도 한다. 여러 번 했던 터라 능숙하게 봉투를 가득 채웠다. 채우고 나면 여유가 생겼다. 눈싸움하듯 편을 갈라 솔방울 싸움을 한다. 하루 중 가장 재미난 시간이다. 한겨울 조개탄이 떨어지면 주워온 솔방울 온기로 교실을 덥혔다.
용천백이 소문이 돌기 전까지 한솔 재는 오가는 놀이터고, 웃음으로 넘어 다니던 신나는 고갯길이었다. 봄이면 연한 삐삐풀 뽑아 달콤함을 맛보고, 진달래꽃과 끈적한 진이 나오는 연한 청미래덩굴 순으로 허기를 달랬던 길이다. 오월이면 잔솔가지 휘어잡고 덜 핀 송화를 한 움큼 입에 물고 단물 빨아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자운영 꽃이 피면 꽃밭에 뒹굴고, 꽃반지 만들어 여자애들에게 끼워주기도 했다. 길옆 땅벌 집을 쑤셔놓고 달아나면 혼비백산 도망치는 여자애들을 보며 재를 넘었다. 철 따라 고소한 개암이며 달콤한 머루가 지천으로 널려있던 곳이 한솔재였다.
지금은 한솔 재를 넘는 이가 없다. 우회 포장도로가 생기고, 그곳을 넘나들 어린이도 없다. 신작로같이 넓게 보였던 고갯길은 잡나무들로 뒤덮여 길이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게 변했다.
추억만이 한솔 재와 용천백이를 기억할 뿐이다.(사진 leej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