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계획하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유럽 사람들처럼 요트 타고 무인도에 가서 멋진 휴가를 즐겨 보자는 제안을 했다. 꿈을 실현할 무인도를 찾던 중 서해 덕적도에서 이십여 킬로 떨어진 ‘선갑도’를 찾아냈고 휴가지로 결정했다.
인천 연안부두를 출발한 여객선은 외항에 정박한 대형 화물선 사이를 빠져나와 팔미도 등대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향했다. 아침 햇빛에 반사된 바다는 거대한 유리 고속도로를 만들어 놓은 듯 잔잔했다. 덕적도까지는 두 시간 정도 걸렸다. 목적지 선갑도는 무인도라 덕적도 진리 포구에서 배를 빌려 들어가야 했다. 나이 지긋한 낚싯배 선장은 선갑도를 간다고 하자,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왜 거기 갈라고 그-랴-, 꼭 가야 혀-” 따지듯 물었다. 돈 주고 가자는데 웬 말이 그리 많은지! 오늘 들어가고, 삼 일 후 다시 오는 조건으로 약속하고 배에 올랐다.
삼십 여분 남쪽으로 내려가자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바다를 가로막고 서 있는 것 같은 암벽의 선갑도가 보였다. 섬을 끼고 서쪽으로 돌자 북쪽 암벽과는 전혀 다르게 수목이 울창하고 ‘C'자 형태의 아름다운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자 물살이 거세다 못해 소용돌이쳤다. 섬에 오르는 걸 막으려는 해신(海神)이 훼방을 놓는듯했다. 거친 물살을 지나 조금 더 섬 안쪽으로 들어서자 확연히 다른 잔잔한 물결이 호수로 착각할 정도다. 배 댈 곳을 찾으며 선장은 매우 불안한 듯 이곳저곳 두리번거렸다. 우리를 급하게 내려놓더니 도망치듯 속도를 높여 떠나버렸다.
물새 알 같은 동글동글한 작은 돌들로 채워진 넓은 해변은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 발길이 안 닿은 자연 그대로다. 가장 높은 북쪽은 병풍을 둘러친 듯 돌산이 위용을 자랑하고,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세는 울창한 수목이 바위들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다. 산 아래쪽은 평지로 바다와 완만하게 연결된 최고의 휴양지로 손색이 없었다. 여행지 선정은 대성공이라며 모두 탄성을 질렀다. 환상의 새 알 해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가져온 짐들을 해변에 던져 놓은 채, 벌거벗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 섬의 주인은 우리였다.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는 한참을 걸어가도 경사가 완만하여 수영하기에 최적의 해수욕장이었다.
해가 지기 전, 야영 준비를 하자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누군가 소리쳤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고 했다. 잡초와 칡넝쿨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오래된 집터였다. 크기로 보아 개인이 살던 집은 분명 아니었다. 살펴볼수록 의문의 흔적은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콘크리트로 만든 3인용 세면대, 우물, 무엇인가 가두어 두었던 것처럼 보이는 두세 평 남짓 되는 지하실, 쇠창살, 또 다른 몇 개의 건물 흔적, 운동장으로 쓰인 것 같은 넓고 편평한 공터. 잡목과 칡넝쿨로 덮여있으나 분명 많은 인원이 사용했던 시설임이 확실했다. 오래전 사용했을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덕적도에서 평생 어부로 살았다는 낚싯배 선장도 알지 못했던 무인도에 지어진 대규모 시설, 무언가 비밀스러운 사연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어둠이 밀려오기 전, 천막을 치고 야영 준비를 해야 했다. 해변엔 물이 들어올지 모르니 편평한 곳을 골라 잡초를 제거하고 천막 두 동을 설치했다. 천막 앞에 둘러앉아 버너에 불을 붙이고, 김치와 소시지를 넉넉히 넣고 찌개를 끓여 저녁 준비를 했다. 소주를 한잔 곁들이며 누군가 이야기를 꺼냈다. 영화 파피용에 나오는 것처럼 특수한 감옥이 있던 자리 같다고, 누군가는 특수부대가 주둔했던 것 같다고 했다. 선장이 도망치듯 황급히 떠난 것도 이상했다. 무인도 여행의 환상과 해변의 아름다움에 취해 들떠있던 분위기는 어둠과 함께 불안한 분위기로 반전되기 시작했다. 해가 지자 칠흑 같은 어둠이 섬을 삼켜버리고, 해변 조약돌보다 많은 별이 찾아왔다. 술기운 탓일까 쉽게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누군가 “뱀이야” 괴성을 지르며 천막에서 뛰쳐나왔다. 괴성에 놀라 모두 천막 밖으로 튀어나왔다. 천막 안으로 플래시를 비추자 제법 커다란 구렁이가 놀랐는지 움직이지 않고 불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몽둥이를 만들더니 구렁이를 죽였다. 불길한 예감에 휴가 분위기는 공포로 급 반전되었다. 몇몇은 괜히 무인도에 왔다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구렁이는 암수가 함께 사는데 하나가 죽으면 복수하러 온다고 불안을 부추겼다. 구렁이는 옛날부터 좋은 징조라며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위축된 분위기는 날이 새면 철수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3일 후 선장이 올 때까지 떠날 방법이 없었다.
이곳 여행을 주도했던 내가 분위기 반전을 꾀해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죽을 때, 죽더라도 최대한 즐기자며 가장 높은 봉우리로 등산을 가자고 했다.
등산로가 없어 나무를 꺾어 돌아올 길을 표시하면서 능선 따라 올랐다. 암벽이 많고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푸른 바닷물의 아름다움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정상에 오르자 사방은 가릴 것 없이 탁 트였다. 북쪽으론 문갑도, 덕적도, 서쪽으로 굴업도, 백야도, 동쪽으론 대이작도와 태안반도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해신(海神)이 있다면 이곳에서 서해를 관장했을 것 같은 탁 트인 전망이 서해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불안감은 아름다운 경치로 인하여 잠시 잊었다.
밤이 되자 구렁이 생각에 천막에 들어가는 것이 께름칙하던 차에, 누군가 “내일 선장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고립돼서 굶어 죽는 거 아냐”라며 불안 거리를 만든다. 식량도 3일치 뿐이고, 연락방법도 없다. 무인도라 배가 올 리도 없고 불안한 생각은 끝이 없다. 주변에 담뱃가루를 뿌려 놓으면 뱀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떨어져 가는 담배를 아끼지 않고 뿌렸다. 천막에 누웠으나 파도에 쓸리는 자갈 소리가 구렁이 기어 오는 소리 같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선장과의 약속된 시간이 반나절이나 남았는데도 초조한 마음에 일찍부터 철수 준비를 했다. 아름다운 해변도, 멋진 무인도 여행의 기대도 구렁이 공포로 인하여 모든 게 망가지고 말았다. 배는 약속된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선장은 우리 눈치를 보면서 “아무 일 없었어? 군인들 없던가?” 우리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배를 황급히 돌려 섬을 떠났다.
어느 정도 섬에서 멀어지자 선장은 말을 꺼냈다. “사형수들을 데려다 북파공작원으로 훈련하는 비밀부대가 이곳에 있었어, 모르고 들어갔다가 걔들한테 죽을 뻔한 선장이 여럿 있어.”
처음에 선갑도에 간다고 하자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과, 우릴 내려놓고 도망치듯 배를 돌렸던 이유, 우리가 보았던 의문의 흔적들이 북파 공작원이 실제 이곳에서 주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형을 기다리다 영문도 모른 채 무인도로 끌려와 살기를 기대하며 고된 훈련을 받았을 그들의 영혼이 선갑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혼령이 구렁이로 환생하여 우리의 철없는 무인도 여행을 공포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사진 : lee j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