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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Mar 23. 2022

화장하는 남자

화장대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뿐 차별하지 않는다.

  화장대 앞에 섰다. 예전 같으면 사내 녀석이 화장대 앞에 얼씬거리다간 고추 떨어진다고 면박을 받을 일이다. 옅은 녹색의 스킨을 면도 자국에 바른 후 보습제 로션을 바른다. 거기다 더해 선크림까지 덧칠한다. 화장하는 손길이 자연스럽다.


  화장대는 모둠 꽃밭처럼 화려하다. 예전 어머니가 사용할 땐 달랐다. 둥근 모양에 분홍 무늬가 박힌 박가분, 사각 모양에 배꽃 무늬로 치장한 설화분, 동백기름 등 밋밋한 꽃밭이었다. 모양도 단순하거니와 색상도 단색 위주였다. 

  화려하게 변한 건 아내가 이어받고부터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칙칙하고 밋밋한 것들을 빨강, 파랑 화려한 것들로 바꿔나갔다. 발정 난 수캉아지 거시기 삐져나오듯 요염한 모양을 닮은 립스틱을 한데 모아 오른쪽에 배치했다. 다양한 색깔의 립스틱을 모아놓은 것만으로도 꽃이 핀 듯 화려하다. 로션은 곡면, 삼각, 사각 다양한 형태의 용기에 담겨있다. 물결무늬, 꽃무늬로 치장한 것들을 중앙에 배치하여 높낮이를 맞췄다. 왼쪽에는 당장이라도 그림을 그리려는 듯 붓을 담근 채 기다리고 있는 매니큐어를 배치했다. 립스틱에 버금가는 색깔로 화려함에 손색이 없다. 크고 작은 것, 둥글고 네모난 것들을 사이사이에 배치하자 화려한 꽃밭이 완성되었다. 



  꽃이 화려하고 향기를 뿜는 건 돋보이기 위함이다. 화장도 매한가지다. 화장을 시작하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화장에도 순서가 있다고는 하나 뽐내려는 화장품들의 질투는 양보가 없다. 피부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진정시켜야 한다며 먼저 맑은 스킨 토너가 나선다. 보고 있던 에센스가 촉촉한 피부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며 치고 나온다. 차례가 지켜지는 듯했다, 문제는 샘 많은 로션에서 발생했다. 흰 피부가 최고라며 미백 로션이 나서자, 촉촉한 윤기가 있어야 물광 피부로 보인다며 광택 로션이 나선다. 티격태격하는 사이 탄력 로션이 나섰다. 질투를 정리라도 하려는 듯 미인은 촉촉한 윤기 나는 새하얀 피부 라야 한다며 혼합형인 자기가 적격이라고 우겨댄다. 다툼이 정리되고 아이크림을 끝으로 얼굴 화장을 마쳤다. 

  비교적 갈등이 적은 건 눈 화장이다. 검다는 이유로 화장대 구석으로 밀려난 눈썹연필과 마스카라는 상대방 시선을 사로잡는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색상이 단순해 다툼이 적다. 특별히 억실억실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눈썹을 보강하고 연장 눈썹을 붙이는 것으로 끝이다. 

  심각한 건 립스틱이다. 질투가 단연 최고다. 그날그날 색상이 바뀌고, 변심이 심하다 보니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옷 색상, 만나는 사람, 날씨, 기분에 따라 선택이 바뀌기 때문이다. 성격 급한 진한 붉은색이 나서서 도전적인 관능미를 선보인다. 요염한 자태로 비비 꼬며 내미는 섹시한 몸매는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너무 진해 튄다며 몽짜 부리 듯 연분홍색이 나선다. 결국엔 두 가지 색이 혼합된 옅은 붉은색으로 낙점되었다. 

  어머니가 볼에 관능미를 주었다면 아내는 입술에 준다. 그래서 립스틱들도 여간 신경 쓰이질 않는다. 최종 선택된 립스틱은 오늘 화장의 화룡점정을 찍는 행운을 얻게 된다. 여러 종류의 화장품이 협력하여 아름다움을 탄생시킨 순간이다. 

  아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만족하지 못했다. 향기 없는 꽃은 매력이 없다며 후각적 아름다움도 중요시했다. 프랑스 여행 중에는 코코 샤넬이 만들었다는 ‘샤넬 넘버 5’를, 밀라노에서는 잘 익은 토마토 향이 나는 ‘토마토’ 향수를, 미국에서는 라즈베리와 크렌베리 향이 독특한 ‘섹스 온 더 비치’를, 도쿄에서는 상큼한 사과 향이 강한 ‘샤우어 롤리 팝’을 구해 향기 나는 꽃밭을 완성했다.     

  아내뿐 아니라 딸도 화장할 조짐이 보였다. 네 살 때 빨간 립스틱으로 입 주위를 마구 칠해 귀신처럼 만들어 놨던 첫 경험을 했을 정도다. 남자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들과 내 화장품도 당당하게 화장대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어머니 땐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함께 외출하는 날이면 화장대 앞은 분주하다. 머리 손질하고 스킨, 로션 바르고 거기다 더해 햇빛 차단제까지 바른다. 향수를 소매 끝에 살짝 뿌리는 것까지 부부가 똑같다. 여자가 군대 가고, 남자 미용사가 파마를 해준다. 화장하고 귀걸이 달고 다니는 남자가 이상하지 않다. 남편이 부엌살림하고, 육아휴직 가는 것을 당연시한다. 남녀 구분은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금남 금녀의 벽이 사라진 시대라 해도 삶에는 분명한 남녀의 다름이 존재한다. 여혐, 남혐의 극단적인 편향성이 표출되고 페미니즘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신이 인간을 세상에 내려 보낼 때 남녀를 구분하여 보낸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화장대는 남녀 구별 없이 모두를 받아준다. 아름다움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뿐이다. 같은 화장대 위에 남녀 화장품이 혼재해도 쓰일 땐 구별되어 본분을 잊지 않는다. 남자가 화장한다고 여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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