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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Mar 18. 2022

아버지의 터

아버지는 굳이 명당을 고집했을까?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음택을 찾아다녔다. 풍수적으로 사신사(四神砂) 형태의 터를 찾고자 했다. 명당이라 소문난 곳은 어디든 찾아갔다. 음택이 뭐 그리 중하다고 그러는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묘를 조성할 변변한 산을 갖고 있지 못해 그러려니 짐작했을 뿐이다. 


  언젠가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릴 적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다. 그 이유를 태어나서 자란 터 때문이라고 여겼다. 산골 마을이라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다. 산지를 개간하여 만든 계단식 논이 전부였다. 그 마저 천수답이라 소출도 여니 논보다 적어 춘궁기에 배를 곯았다. 

  살아가는 터가 어디냐에 따라 빈부 차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자식만큼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터에서 태어나기를 소원했다. 결혼하여 분가할 집을 구할 때도 그런 점을 중하게 여겼다. 태어날 자식을 위해 사신사 형태의 집터를 찾으려 했다. 산세의 기운이 자식들에게 발현되어 가난에서 벗어나길 기원해서다. 최고의 명당은 아니나 북쪽에 산이 있어 바람을 막아주고 남쪽으로 강이 흐르는 배산임수형의 터를 찾았다. 향천리 ‘시루셍이’ 마을이다. 앞 장산천은 일 년 내내 물이 흘러 농사짓기에 좋고 뒤편 산이 북풍을 막아주어 따뜻한 곳이다.

 “촌에서 태어나면 농사꾼 되고, 섬서 태어나면 물게기 잡는 어부 되는 겨. 미국 살면 미국 사람 되고 아프리카 살면 아프리카 깜뎅이 되는 벱 여. 왜 사람들은 자슥 나면 서울로 보내야 허고, 나귀는 제주도로 보내야 헌다는 지 알어? 터가 중허기 때문 여.”  

 


  아버지는 자식을 도시에 보내 배를 골치 않게 하려 했다. 품을 팔아도 도시로 나가야 일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객지서 자리 잡으려면 몇 배 더 고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해서 보냈다.  

  각오는 했지만, 객지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미아리 산동네 판자촌 셋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물지게 지고 언덕을 내려와 수도 집에서 물을 길어야 했고. 빨래는 정릉 계곡에서 했다. 고향보다 몇 배 힘들었다. 그렇게 이십 년을 버틴 뒤에야 서울 사람이 되었다. 서울 살면서 터의 중요함을 강조하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서울이라도 강북과 강남 다르고, 목 좋은 터는 장사가 잘되고, 지역에 따라 집값도 달랐다. 

  자식은 서울 보내 가난의 터를 벗어나게 했으나 아버지는 현실적으로 살아온 터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이 한으로 남았다. 다음 생애는 풍요의 터에서 태어나고픈 꿈을 이루고자 명당에 음택을 정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명당을 찾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후 십 년이 되던 해, 생전에 그렇게 원했던 명당에 아버지 음택을 마련했다. 유명하다는 풍수가와 지관의 조언을 받아 찾아낸 곳이다. 뒤편엔 그곳에서 발아(發芽)하여 뿌리박고 백여 년 넘게 터를 지켜온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쳐있고. 좌청룡을 이루는 능선의 끝자락에는 어른 몇 아름으로도 껴안을 수 없는 수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론 화성 읍내가 한눈에 굽어 보이는 양지바른 곳이다. 그곳으로 이장하고 묘 둘레는 화강암으로 장식했다. 품질 좋은 남포산 오석으로 비석을 세우고 상석과 향로 석도 배치했다. 다람쥐를 조각한 어른 키만 한 망주석 두 개를 양쪽에 세워 표지로 삼고. 장명등(長明燈)을 가까이에 세워 어둠을 갈라 아버지의 앞길을 영원히 밝히도록 했다.

  좋은 터에서 백여 년을 자라온 소나무처럼 아버지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마련한 아버지의 터다. 그곳에서 다음 생애를 준비하며 행복해하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사진 : lee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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