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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Mar 29. 2022

일 구 오 사

'행복인생 평가표'를 만들었다.

  찰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떼어 낼 수도 없다. 형체도, 어디에 붙어있는지 알 수 없으나 내 삶 모든 것에 관여한다. 심지어 신분을 증명하는 일에까지 끼어든다.


  태어난 순간 그를 만났다. 그와 함께해야 할 운명임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겼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을 절대 잊지 않았다. 혹여 잊을세라 달력에 동그란 표시를 해 놓았다. 그날이 되면 미역국 끓이고 수수 팥 떡도 만들었다. 

  인생의 중요한 부분마다 그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초등학교 입학하려 하자 이름보다 그를 먼저 확인했다. 또래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기준으로 입학 가능 여부를 결정했다. 호기심 많은 사춘기에 미성년자라고 구분해 놓은 것도 그였다. 교복 대신 사복으로 변장하고 클럽에 들어가려다 제지당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처구니없었다. 어른만 한 키에 몸무게 오십 킬로그램 성인과 다를 것 없는 덩치인데도 그 때문에 제지당했다. 그가 없었다면 제지당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군에 입대하는 것조차도 그를 기준으로 정했다.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신분을 증명하는 일에는 어김없이 끼어들었다. 은행거래를 하거나 외국에 나갈 때, 중요한 계약을 할 때도 그와 처음 만난 날짜를 표시해야 했다. 이름을 말하고, 사진을 붙인 증명서를 보여줘도 믿질 못하면 마지막으로 그를 확인해주면 인정했다.             

  그 녀석은 나이라는 이름으로 인생을 나열해 놓았다. 신기한 건 그 녀석이 나열해 놓은 순서에 따라 스스로 맞춰 살아간다는 점이다. 여섯 살이 되면 학교에 들어가려 하고, 스무 살이 넘으면 성인이 되었다고 결혼하여 독립하려 한다. 육십이 지나면 직장에서 퇴직할 준비를 하고, 나열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죽을 날을 예측하기도 한다.

  마음뿐만 아니다. 육체도 나열해 놓은 위치에 따라 변했다. 키가 자라고 몸집이 커지다가 어느 시점에서 멈추고 노화가 시작되었다. 어린이, 청년, 노인으로 정해놓은 시점에 생각이 다르고 행동거지도 달라졌다. 

  일구오사(1954) 년부터 그가 펼쳐놓은 나이 스펙트럼에 맞춰 충실하게 살아왔다. 청소년기 학교에 다니며 많은 친구도 사귀고 추억도 만들었다. 서른 넘어서는 결혼 하여 자녀도 낳았고 왕성한 젊음을 바탕으로 주변에서 인정받으려 모든 능력을 다해 사회생활을 했다. 그러다 은퇴 기라 정해놓은 시점에 퇴직까지 충실하게 실행했다. 


  종반으로 향하는 삶을 잘 준비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기로 했다. 언젠지 알 수 없는 나열의 끝자락에 갑자기 도달하여 후회가 남을까 염려돼서다. 이런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얼마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난 친구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건강을 유지했었다. 본인 행복보다 주변에서 인정받으려, 가족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좋은 친구였다. 그리 사느라 삶의 끝자락을 전혀 보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끝자락에 도달하여 준비 없이 생을 마감했다. 얼마나 많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후회하며 떠났을까…!

  그 친구의 준비 없는 마지막을 보면서 내 인생 스펙트럼 마지막 숫자를 스스로 이공삼구(2039) 년으로 정했다. 목적지를 정하고 나니 많이 남았단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이 심장을 닦달한다. 천천히 걸으며 몇 차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달랬다. ‘더 열심히 즐기고 살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보너스를 준다고 하니 하루하루 알차게 보내자고’ 했다. 그러기 위해 지나온 삶을 뒤 돌아보았다. 온전히 나를 위해 행복한 삶을 살아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일들이, 가족을 위해 모든 것 다하며 살았던 것들이 나를 위한 행복한 삶이었을까? 

  오래전에 만들어 놓았던 ‘성공 인생 평가표’를 꺼내 보았다. 「아내가 다음 생에 당신을 또 만나도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라고 말해주면 50점, 자식들이 손주에게 할아버지는 좋은 분이셨어.라고 말한다면 10점 추가. 알고 지낸 지인들이 그 사람 괜찮았어! 좋은 친구야 라고 평해주면 10점. 마지막으로 아내나 자식들 병시중받지 않고 생을 마감한다면 30점」으로 정해놓았었다. 이 평가표가 내 행복을 위한 평가표였을까?  

           


  이공 삼구 년에 도달하기 전 나를 위한 괜찮은 인생으로 살아보기 위한 그림을 그려본다.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이란 책에서 ‘행복이란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며, 저축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축적되지 않는 큰 행복을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일상에서 수시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차 한 모금 즐기는 여유, 좋은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의 행복, 잡초에 핀 이름 모를 꽃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그 녀석이 나열해 놓은 끝자락에 다다를 때까지 소소한 감성을 만나 행복 해지는 순간을 한 올씩 엮어가야겠다. 한 올씩 엮어 만든 ‘소소한 행복 인생 평가표’를 다시 만들어 본다. 

 「아내와 보이차 한 잔 마셨으니 1점, 손주와 통화했으니 1점, 골프장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으니 1점, 설거지를 도와주었으니 1점, 발코니 화분에 물을 주었으니 1점….」  

      

  결국,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위해 살아가는 과정인걸! 내 행복 총점은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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