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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Jun 06. 2022

세상에서 가장 비싼 수업료

아직도 이념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고교 1학년 여름, ‘죄와 벌’에 대한 가장 비싼 수험료를 치렀다. 그날은 혼기 놓친 형님의 늦깎이 결혼식이 있던 날이었다. 전통 혼례로 시골 초가집 마당에 차양을 치고 식을 했다. 축하객은 마을 사람들이라 동네 잔칫날이다. 어린아이부터 온 가족이 함께 찾아와 국수, 떡, 과일 등 잔치 음식 한 상 차려 먹고 가는 것이 시골 결혼식이다. 몇 사람은 종일 자리 잡고 앉아 이 사람 저 사람 손님 접대하듯 하루 내내 술에 취해 있는 것도 잔치 풍경이다. 

  청소년들도 읍내 학교에서 돌아와 늦은 시각 어른들이 돌아간 자리를 대신하여 잔치 음식에 막걸리도 마셔볼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아랫마을 ‘벌말’에 사는 영기도 끼어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3년생으로 태권도장에 다녀 싸움깨나 한다고 소문나 있었다. 막걸리 취기 탓일까? 영기와 우리 동네 학생들 간에 시비가 벌어졌다. 사소한 시비는 마을 간 싸움으로 확대되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번졌다. 형님 결혼식이 마을 최악의 날로 확대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 날, 영기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병원에 갈 정도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 흔한 청소년들 싸움이었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싸움에 가담했던 학생들은 혼날 것과 치료비 물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수군대고 있었다. 애들 싸움이니 별일 있겠냐며 어른들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며칠이 지났다.     

  보름 정도 지나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싸움에 가담했던 학생들이 파출소로 연행돼 간 것이다. 영기 아버지가 폭행죄로 고소했단다. 고소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순박한 농민이 대부분이라 자식이 파출소로 끌려간 상황은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부모들은 벌말 사는 영기 부모를 찾아가 사죄하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으나 냉정히 거절할 뿐 고소를 취하해 주지 않았다. 

  학생들 싸움을 무리하게 고소한 데에는 맺힌 한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6․25 전쟁 당시의 사상적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수십 년 지난 지금까지 恨으로 남아 앙갚음을 한 거였다. 당시 아랫마을 ‘벌말’은 박 씨 집성촌으로 좌익 공산당에 가담하였고, 우리가 사는 윗마을 ‘남월’은 경주 이 씨 집성촌으로 우익에 속해 있었다. 좌우로 갈라진 두 마을은 內戰 같은 사상 전쟁을 치렀다. 밤이 되면 좌익계 벌말 청년들이 공산당원들과 산에서 내려와 남월 우익계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잔인하게 죽였고, 낮이면 군경과 합류한 남월 마을 사람들이 벌말 사람들을 소탕했던 전쟁의 한이 잠재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학생 싸움을 계기로 조상의 恨을 갚아줄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영기 아버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태어나지도 안 했던 학생들이 과거사의 앙갚음을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기 아버지는 완장 차고 인민군 앞잡이 하던 험악한 태도로 소 취하는 절대 없으며 폭행 전과자 만들어 한을 풀겠다는 심산이었다.    

  학생들은 파출소에서 폭행과 위협 속에서 조사를 받았다. 콘크리트 바닥에 소위 ‘원산 포격’ 상태에서 좌우로 이동시켜 머리가 빠지고 두피에 상처가 나서 혈흔이 보일 지경이었다. 파출소에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관 중 영기 삼촌인 벌말 출신 박 순경이 악질적으로 괴롭혔다. 평생 농사만 지어온 부모들은 법률적 무지, 인권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사회적 상황에서 폭행과 비인권적 조사에 대하여 이의 제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건은 경찰서로 이관되어 2차 조사를 받았다. 구속을 면하려면 피해자 합의서를 받아 오라고 했다. 합의금이 필요했다. 농촌에서 합의금을 마련하는 것은 아들 구치소 보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자식 같은 농사 밑천 소를 내다 팔고. 먹고 살 생명줄 같은 다랑이 논을 팔았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집들은 전국 친척을 찾아가 빌린 돈으로 합의금을 마련했다. 합의금을 가지고 영기 부모에게 머리 조아려 사죄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빌었다. “우리 아버지가 당신네 부모들이 고발하여 국군에 끌려가 총살당할 때 우리도 애걸했어”라며 냉혹한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우리 마을에선 합의금 갖다 주었으니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7월 중순이었다. 대전지방법원에서 발신한 등기우편이 싸움에 가담했던 학생 집으로 배달되었다. ‘폭력 행위 및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행위’로 조사할 것이 있으니 법원으로 나오라는 소환 명령이었다.

  싸움 후유증은 장마철 낙뢰처럼 놀라게 했다. 서울에 살던 나도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와 법원에서 친구들과 합류했다. 법정에서 개개인의 신분을 확인하고 사건 내용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법정 구속되었다. 영기의 피해 정도보다 여러 명이 한 명을 상대로 싸운 것이 문제였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 실제 일어났다.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네 평 남짓한 법원 유치장은 맹수 사육장처럼 굵은 쇠창살로 튼튼하게 만들어졌고 큼직한 열쇠가 채워졌다. 벽면에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죽여 버리겠다, 다시 오지 않는다, 억울하다, X 할 놈…’ 낙서가 어지럽게 쓰여 있었다. 우리 외에도 대여섯 명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채 말이 없다. 유치장 밖이 떠들썩하더니 박박 머리에 포승줄에 묶인 채 죄수복을 입은 한 무리가 교도관에 끌려 유치장으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미 별을 여러 개 달고 있는 듯 용 문신을 새긴 죄수와 그 주변을 따르는 몇 명의 행동대원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네 형님, 형님” 연신 굽신거리는 그들과 달리 용 문신은 묵직한 톤의 목소리로 유치장을 압도했다. 

  재판이 시작되었는지 죄수들이 법원 경위를 따라 한두 명씩 법정으로 나갔다. 몇 명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몇은 형이 확정되어 다시 유치장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문제였다. 분을 삭이지 못해 괴성을 지르고 벽면을 주먹으로 쳤다. 난동을 부려도 제지하거나 와보는 교도관은 없었다. 그때, 용 문신이 “조용히 해” 짧게 말하자 난동은 종료되었다. 석방된다고 장담하고 우리 돈을 갈취해간 그 용 문신은 석방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유치장 바닥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과묵한 행동에서 별만큼이나 죄수들의 큰 형님다운 위압감이 풍겼다.     

  오후가 되자 창살이 설치된 버스로 어디론가 이동했다. 누군가 말했다. 대전시 변두리에 있는 식장산 소년원으로 간다고 했다. 가위탁 처분에 따라 보호소에 일정 기간 수용된다고 죄수복 입은 누군가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신분확인 후 분리 수감되었다.

  내가 배정된 7번 방에는 이미 10여 명이 있었다. 범죄자가 우글거리는 험악한 세상에 홀로 던져졌다. 이빨을 드러낸 하이에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생존 불가지역에 홀로 던져진 것 같았다.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적응해야 했다. 감방은 굵은 쇠창살 문을 2번이나 통과해야 했다. 숨 쉴 공기만 겨우 드나들 것 같은 조그만 창이 외부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틈이었다. 일과 중 대부분은 수감자들의 범행 무용담을 듣는 것이다. 절도, 폭력, 강간 모든 범죄의 종합 편이다. 교도소에 수감된 것을 학교에 간다고 했다. 학교에선 범죄 경험과 어두운 밑바닥 삶의 생생한 실화가 경험자를 통해 듣는 기회다. 수감은 사회로부터 격리를 통해 죄를 뉘우치도록 하는 교정이 목표인데 실상은 반대였다. 범죄 무용담을 통해 범죄 수법을 습득하는 학교 같았다. 수감생활은 우리에 갇힌 동물과 다를 바 없었다. 죽지 않도록 먹이만 받아먹고사는 삶이다. 꺼내 주지 않으면 우리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삶, 인간이 아닌 동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짓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수감자 대부분은 뉘우침보다 재수 없어 걸렸다고, 새로운 범죄 수법과 복수심만 키워가고 있었다.     

  수용 생활은 지루한 시간의 싸움이었다. 삼 일째 되던 날 방장은 오랜 빵 생활로 피가 부족하여 싱싱한 피를 한 컵 마셔야겠다며 채혈 대상자로 나를 지목했다. 덩치 큰 두 명이 양팔을 강하게 잡더니 수건으로 눈을 가렸다. 엉덩이가 보이게 바지를 내린 후, 피를 빼는 동안 어지럼증이 느껴지면 즉시 말하라고 했다. 쇼크로 죽을 수 있다며 주의사항을 말해 준다. 눈을 가린 상태라 불안은 극에 달했다. 팔을 더욱 강하게 잡더니 날카로운 것으로 엉덩이 부분을 팍 찔렀다. 콸콸 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머리가 노래지며 어지러워지고 숨이 가빠지면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아- 아-”소리를 질렀다. 잡고 있던 팔을 놓으며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눈 가린 수건을 풀자 파안대소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엉덩이 상처도 피도 흘리지 않았다. 극도의 심리적 공포 놀이였다. 

  새로 입소된 신입을 상대로 같은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서 해답을 찾았다. 엉덩이를 찌른 것은 이쑤시개, 피가 흐르는 청각 효과는 찌르는 순간 타이밍에 맞춰 준비한 물을 조금씩 컵에 흘려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은 효과음을 내는 거였다. 양팔을 건장한 사람이 잡은 것도 불안 조성을 위한 연출이었다.     


  2주가 지나자 수감생활에 적응되고 여유도 생겼다. 싸움 후회보다 고소한 영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쌓여갔다. 사소한 학생 싸움으로 구속까지 된 것은 배우지 못한 부모의 무지가 원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배움이 필요함을 억울함에서 느꼈다. 법대에 진학해야겠다고 다짐을 반복하며 시간을 견뎠다. 

  한 달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법원에서 판사의 훈계를 듣고 석방되었다. 비닐봉지에서 두부를 꺼내 먹여주시며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 가족 생계가 달린 다랑이 논을 팔아 비싼 수업료를 주고 배운 것은 죄를 짓고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 배워야 대항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청소년기 아픈 경험으로 인생 방향이 바뀌었다. 법대에 진학했고 고위 공직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 자랑을 낙으로 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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