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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Jun 15. 2022

오만 원의 행복

그를 행복하게 만든 건 오만 원 지폐 한 장이었다.

  오랜만에 선배를 만났다. 십여 년 전 퇴직한 분이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발걸음도 경쾌하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그 말을 듣더니 선배는 말문을 열었다. 뜬금없이 “퇴직 전에 비자금 좀 만들어 놨어?”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늙으니 돈이 최고더라고. 퇴직하면서 선후배 경조사는 꼭 챙기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지갑이 가벼워지니 실천할 수 없더구먼. 생활이 나태해질까 봐 초등학생처럼 일과표를 짜서 여섯 시 기상, 아침 운동, 일곱 시 아침 식사…. 일찍 일어나 운동도 하고, 집사람하고 대화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해 봤어. 그동안 못 갔던 여행이며 친구도 만나고, 친목 모임도 나가겠다고 했더니 집사람이 한마디 하더라고. “당신만 그럴 것이 아니라. 나도 내 시간 좀 가집시다. 당신 뒷바라지에 집안 살림, 애들 키우느라 좋은 시절 다 갔어요. 남은 건 파뿌리에 골짜기같이 파인 주름살뿐이에요. 이젠 나도 좀 벗어납시다.” 집사람은 한 마디도 안 져, 대화가 아니고 싸움이 된다니까.

  제일 곤란한 건 용돈이야 체면 유지해야 하니 매월 오십만 원씩 용돈을 달라고 했더니 버럭 화를 내는 거야. 집에서 노는 데 뭔 돈이 필요하냐며 무시하더라고. 연금통장은 집사람 치마 속에 숨어버려 구경도 못 하지 돈 문제는 절대 협상 불가야. 퇴직 전에 비상금 만들어 놓으라 했던 선배 충고를 무시한 탓이지 뭐. 쏟아진 물이니 적응하는 수밖에 없더라고. 얼마 전에 아주 창피한 일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말에 최 국장 아들 결혼식 다녀오겠다고 말했다가 면박당했어. 퇴직했는데 경조사마다 어떻게 다 챙기냐며 현직에 있는 줄 착각하지 말라는 거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상해 집을 나왔는데 갈 곳이 없어 뒷산을 올라갔는데 한심하더라고…. 

  나름대로 실속 없는 모임이며 체면치레용 경조사는 과감히 줄였는데도 집사람이 잔소리해대니 사람들이 졸혼이니 뭔가를 하는가 봐. 어쩌다 경조사에 가는 날이면 오만 원 넣은 봉투와 교통카드 한 장만 달랑 주는 거야. 그때마다 실랑이가 벌어져.

 “여보, 오만 원이 뭐요? 체면이 있는데 십만 원은 해야지.”

 “아직도 착각하고 계시네. 당신은 퇴직자예요, 무직자.”

 “강남에서 한다는데 밥값도 안 돼요. 차라리 안 가는 게 낫지.”

 “그래도 가야지요. 우리 애들 결혼식도 남았는데.”  

  집사람은 매사가 계산적이거든. 그런 날은 결혼식에 가도 어깨가 처져. 혼주 만나 눈도장을 찍고 옛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지만 자신감 없는 억지웃음만 나와. 식권 한 장 받아 들고 식당 가면 밥 얻어먹으러 온 것 같아 영 찝찝하고. 이야기도 건성으로 들려. 누구는 커피 전문점 개업했다가 들어 먹었고, 담배 오랫동안 피우던 이 과장은 폐가 망가져 입원했다는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라 관심도 없고. 그런 날은 꼭 곤란한 일이 벌어지더라고. 식사 겸 소맥으로 한 순배 돌고 났을 때야, 올해 퇴직한 막내가 “선배님, 커피숍으로 자리 옮겨 차 한잔하시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띵 한 거야. 찻값을 내야 선배 체면이 서는데…. 자리를 벗어나야겠더라고. “아! 미안해서 어떡하지. 다른 약속이 있어 먼저 가볼게. 커피는 다음에 하자고.”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맛이더라고. 당해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해. 집으로 오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가 가라앉지 않더라고. 애꿎은 고양이한테 화풀이했지. “저것들은 왜 이렇게 새끼를 많이 낳는 거야? 고양이 천지네 천지. 저리 가.” 소리를 질러도 분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거야.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마누라에게 용돈을 타다 써야 한단 말이야! 평생 온갖 설움 다 견디며 직장 생활해서 돈을 벌어왔는데. 누구 덕에 먹고살고 새끼들 키웠는데 푸대접이야 푸대접이! 지금도 내 연금 덕에 살고 있으면서 큰소리는 다 치고 말이야. 연금법은 왜 이따위야. 남편 몫을 따로 떼어주도록 법을 만들어야 할 거 아냐.” 술주정뱅이처럼 중얼거리며 집으로 왔는데도 화가 풀리지 않아 초인종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여러 번 두드렸지.

  눈치 없는 집사람이 현관에 들어서자 “잘 다녀왔어요? 신부가 예쁘든가요?” “신부가 예쁘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내 며느리도 아닌데.” 퉁명스럽게 내뱉었지. 도망치듯 먼저 온 화풀이를 하는 거지.  



  오늘은 마누라가 엉뚱해서 되레 당황스럽더라고. 집을 나서는데 축의금 외에 오만 원을 별도로 주면서 동료들 만나 차라도 한잔 마시고 오라는 거야 백지 수표를 받은 기분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선배는 결혼식을 대충 보더니 식당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테이블 중앙에 앉은 선배는 후배들과 담소 나누는 내내 자신감 넘치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대화도 주도적이었다.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큰소리로 그가 말했다. “길 건너 커피숍 있던데 같이 가서 차 한잔하고 갑시다.” 선배는 커피숍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자리들 앉아요. 내가 계산하고 갈게.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3잔, 카푸치노 2잔. 얼마죠?”

   “22,500원입니다.”    

  잠시 후 선배 앞에 놓아둔 주문 진동벨이 ‘드르륵드르륵’ 호들갑을 떤다. 네 명의 시선이 선배에게 쏠렸다. 커피를 받으러 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만 원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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