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커다란 꽃다발 들고 졸업식에 가자고 다짐했다.
색색 고무풍선을 든 고사리손이 예쁘다. 해맑은 웃음소리는 더 아름답다. 행복한 소리가 어린이 대공원 담장을 넘는다.
‘꿈 마루’에 올라 공원을 돌아본다. 벗겨지고 갈라진 낡은 기둥이 세월을 받치고 있다. 이곳이 1926년 영친왕의 지시로 만든 골프장이었던 ‘서울컨트리클럽’ 클럽하우스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맨 위층에 있는 북 카페에 들러 창밖을 내다보다 오래전 친구 고교 졸업식 날 울면서 대공원 담장을 걸었던 기억이, 어린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에 섞여 생생하게 다가온다.
졸업식장은 축하객들로 가득 찼다. 꽃다발과 졸업장 케이스를 갖고 온 가족, 곱게 포장한 앨범을 선물을 갖고 온 친척들이 뒤섞여 졸업생을 축하해준다. 여기저기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인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다. 친구는 졸업생 좌석에 앉아있을 뿐 축하해주는 이가 없다. 졸업장 받는 것 자체가 서러움으로 다가온다. 운동장 구석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가 유일한 축하객이다.
그는 대천에서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기고를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애당초 주간 고등학교 지원은 무리였다. 낮엔 학비를 벌고 야간에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수송동에 있는 J고 야간부에 입학했다. 낮에는 광진교 다리 검문소에서 근무 경찰의 취사와 심부름을 하고 백 원 정도의 일당을 받았다. 경찰과 헌병이 시외버스를 검문하는 사이 여성 차장들이 검문소로 들어와 소정의 현금을 상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상납금 중에서 일당을 주는 것 같았다. 검문소를 지나는 모든 차량은 상납의 대상이었다. 막걸리 수송 차량은 막걸리를, 과일 차량은 과일을 심지어 채소장사의 트럭에서도 상납을 받았다. 검문소 지하에 있는 내무실에서 숙식하며 버스 회수권 10장 값을 일당으로 받았으니 학비 충당은 가능했다.
문제는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이십 대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사회 뒤편의 어둡고 거친 경험을 먼저 하게 되어 조숙했다. 통금시간이 임박하면 인근 모토로라와 화이자 공장에서 야근 마치고 광진교를 건너 천호동 자취방으로 퇴근하는 여공들이 많았다. 헌병들은 그들을 희롱하고 광나루 백사장에서 진한 데이트를 즐기는 것을 보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막걸리에 취해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고, 담배를 배워 친구들에게 전파하기도 했다.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
졸업식을 끝내는 순간, 교복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밀가루 범벅이 된 채 종로거리를 헤매며 자유를 만끽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해방감이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무교동 낙지 골목으로 찾아들었다. 술을 마셔도 뭐랄 사람이 없다. 학생이 아니니까…
경쟁적으로 마셔대던 녀석들은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잠들고, 화장실 들락거리며 토하고, 담배 꼬나물고 어른 흉내 내며 난장판이다.
문어 다리 된 친구를 부축이고 꼬부라진 혀 다독이며 버스에 올랐다. 종로에서 광진교까지는 한 시간 남짓 가야 한다.
한양대 앞을 지날 때 친구가 소변이 급하다고 했다. 내렸다 다시 타려면 버스 회수권이 필요하니 광진교까지 참으라고 했다. 한계치에 도달했는지 배가 아프단다. 도저히 안 되겠단다. 오후 시간대라 버스 내 승객은 두세 명뿐이었다. 화양리를 지날 때쯤 맨 뒷좌석에 앉았던 친구는 한계치를 이기지 못하고 지퍼를 내리고 말았다. 막걸리 탓일까! 용량이 평소보다 두 배는 됨직했다.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었다. 중간에 타고 있던 아주머니가 “차장 아가씨 버스 안에 웬 물이야? 치마 젖었어.” 하며 차장을 불렀다. 원인을 찾아낸 차장이 운전기사에 알리는 순간 버스는 길옆에 정차했다. 만취된 친구는 천하태평이다.
씨름 선수같이 거구의 버스 기사는 닭 모가지 잡듯 양손에 우리 멱살을 부여잡고 끌어내렸다. “어린놈들이 대낮부터 술을 처먹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쟁반만 한 손바닥이 보이는가 싶더니 뺨에 불벼락이 떨어졌다. 고개가 반 바퀴 돌아가고, 문어 다리 친구는 내동댕이쳐졌다. 버스 바닥에 남아있던 누런 물기를 모두 닦아 낸 다음에야 버스 기사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쳐진 우리는 차비가 없어 광진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버스 기사 욕하고, 부모 원망하다 미친 녀석처럼 키득거렸다. 간혹 소리도 지르고, 큰소리로 웃으며 무작정 걸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지난해 개장한 가족공원(현 서울 어린이 대공원) 담장 옆을 지나고 있었다. 펜스 담장 너머엔 졸업식을 마친 또래 학생들이 공원 잔디밭에서 가족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세상 사람들이다.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꽃다발 대신 귀싸대기로 졸업식을 마무리해야 하는 처지가 서글펐다. 친구 어깨를 끌어안고 울며 펜스 넘어 웃음소리를 벗어나야 했다.
걸어온 탓인지 술이 좀 깨었다. 검문소로 가봤자 반기거나 축하해줄 사람도 없다. 뒤편 용당산 호텔(얼마 전까지 한강 호텔) 나무 그늘에 앉았다. 어른이 되면 커다란 꽃다발 갖고 자식들 졸업식장에 가자고, 사진도 많이 찍어주자고 다짐했다. 워커힐 뒷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