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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Dec 04. 2022

봉황새 따라간 훈이

진실도 권력 앞에는 잊힌다.

   훈이는 봉황새 따라 승천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그를 찾아 동작동 국립 현충원을 찾았다. 현충일이라 참배객들로 인산인해다. 6․25 때 전사한 아들 묘비를 찾아온 허리 굽은 할머니.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 묘비에 절을 올리는 유복자 아들, 야유회 나온 듯 뛰어다니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도 있다. 

  훈이는 옆집 살던 이장네 차남이다. 그와는 초등학교 6년간 떨어진 적 없는 친구였다. 초등학교 마치고 서울로 진학한 그를 다시 만난 건, 삼 년 후 고등학교 때였다. 노량진 본동 산동네서 자취하던 친구는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학업엔 별 흥미가 없었다. 

  고교 졸업 후 그는 뜬금없이 공수부대에 지원 입대했다. 군인이 성격에 맞는다고 했다. 동기생 중에서 가장 먼저 상사 계급장을 달았고, 결혼도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랬던 그를 현충원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훈이는 82년 2월 첫날밤 전화를 걸어왔다. 며칠 후‘봉황새 작전’에 투입되어 제주에 간다고 좋아했다. 짧은 통화는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목소리가 되었다.

  2월 5일 9시 저녁 뉴스에 ‘한라산에서 대침투 훈련 중이던 국군장병이 기상악화로 전원 순직했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군사정부의 언론통제로 사고 소식은 더 이상 보도되지 않았다.

  그가 순직 장병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며칠 후였다. 훈이 아버지는 군에서 마련한 특별기를 타고 제주에 갔으나 사고 현장은 폭설로 접근할 수 없었다. 순직 장병들이 타고 간 C-123 수송기는 한라산 중턱 해발 1,060m 지점 ‘개미 등 계곡’에 추락했다. 산산조각 부서진 기체는 사고 다음 날 발견되었으며 전원이 사망했다. 

  그가 속한 707부대는 5 공수여단에서 분리된 대통령 경호 전담 부대였다. 사고 수송기에는 부대 장병 47명과 공군 항공기 운용 요원 6명 등 53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주 국제공항 새 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하는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한 선발대였다.    

  사고 현장은 군인들에 의해 출입이 철저히 통제됐다. 유가족이 제주에 도착한 날은 폭설로 현장방문은 불가했다. 사고 수습 소식은 군의 발표에 의존해야만 했다. 특전사 요원 백여 명이 투입되어 시신 수습이 완료되었고, 사고 당시 기체 폭발로 화재가 발생해 시신을 분간할 수 없어 화장처리했다고 거짓 브리핑을 했다. 사망자 신원확인 절차도 없이 일괄 화장 처리하는 엄청난 일이 현지에서 벌어졌다. 

  그즈음 제주에는 사고와 관련된 여러 가지 소문이 퍼졌다. 사고 뒤처리는 훈련 중 벌어진 단순 추락으로 마무리하라는 청와대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시신 상태가 너무 처참해 신원을 확인할 수 없고, 추락 수송기 밑에 깔린 여러 구의 시신을 수습하기 어려워지자 사고기 잔해를 인위적으로 폭파해 시신을 두 번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과 절단된 신체 부분들을 자루에 대충 담아 와서 화장했다는 등 다양한 소문이 돌았으나 언론통제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고 발생 100일 추모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훈이 아버지는 실신 상태였다. 사고 현장 주변을 둘러보던 유가족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실신하여 쓰러졌단다. 시신을 모두 수습했다는 군의 발표와 달리 쌓였던 눈이 녹자 숲 속 이곳저곳에서 수습되지 않아 썩어가는 신체 부위들이 발견되었다. 찢긴 살점, 불에 탄 시신 일부, 잘린 팔다리 등이 흩어져 있었다. 너무 끔찍해 슬퍼하거나 울지도 못한 채 분노에 치를 떨어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입만 벌리고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닐봉지를 들고 시신 조각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집게를 들고 어떤 사람은 집게를 팽개친 채 손으로 흩어진 살점을 주워 담았다. 팔다리를 구분할 수 없고 누구의 살점인지 알 수 없는. 도저히 사람의 신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함에 눈에 보이는 대로 무감각하게 주워 담은 것이 이십 킬로그램 쌀자루 3개에 가득 찼다. 쉬파리와 까마귀가 몰려있는 곳을 들추면 부패되어가는 시신 조각이 있었다. 사고 직후 수습하여 가져가지 않고 자루에 담아놓은 시신도 발견됐다. 현장 방문한 모든 이들이 이성을 잃었다. 뼛조각을 자기 아들 거라며 서로 가져가겠다고 아귀다툼하는 일도 벌어졌다. 통제 불능 상태가 되자 인솔 군인들은 허공에 공포탄을 쏘며 유가족 통제를 시도하자 나를 쏴 죽이라며 실신하여 쓰러지는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훈이 아버지가 전했다.    

  군의 사고 수습 진실은 몇 달 지난 다음에 알려졌다. 시신 수습은 기체 잔해가 발견된 다음 날인 2월 7일과 8일 고작 9시간 동안 대충 수습하여 다음 날 화장 처리하여 군사작전하듯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사고 발생 닷새 후 합동 영결식이 동작동 현충원에서 있었다. 소수의 유가족만 참석하여 오열했을 뿐 덮으려는 권력에 의해 한 줄 언론 보도도 없었다. 국방부는 넉 달이 지난 6월 2일에서야 사고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 대통령 경호가 아닌 훈련 중 사고였다는 뻔뻔한 거짓 발표에 유가족들은 또 한 번 분노했다.

  그렇게 대충 처리하다 보니 동작동에 묻힌 유골은 이름만 훈이고 누군지 모를 순직 장병들의 유골이 뒤섞인 혼합 유골을 한 줌씩 나누어 묻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한라산에 처박혀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비참한 죽음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비참하게 죽고, 대충 처리하고, 권력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훈이 아버지는 잊혀가는 아들 죽음이 너무 안타까워 유가족 대표를 맡았다. 농촌 이장 경력이 전부인 그는 군 당국과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후원 없는 시골 노인이 홀로 나서 봤자 바위에 달걀 치기지만 잊히는 건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대했다. 군사기밀이란 이유로 모든 사실을 덮어버렸다. 오랜 투쟁 끝에 한라산 중턱에 위령탑 건립을 받아낸 것은 아들에 대한 훈이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매년 2월 5일이면 제주 관음사 야영장 근처에 있는 충성 공원에 세워진 위령탑에서 공수특전사 부대장과 장병들이 참석하여 덮어버린 진실에 대하여 사과하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대침투 작전’이라고 거짓으로 새겨진 추모비 앞에서….    


 친구 훈이는 ‘봉황새 작전’에 나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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