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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Apr 11. 2022

상림숲 찬가

천 년 상림숲이 지금 그 곳에 있다

  경남 함양에 가면 상림숲이 있다. 진성여왕 때 백성들이 산과 들에서 한 그루 한 그루 옮겨와 가꿔온 숲이다. 이곳 사람들은 목재가 부족하여 움집을 짓고, 한 짐 땔감이 아쉬웠던 혹한 겨울에도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내며 이 숲을 천 년 동안 지켜왔다. 아름다운 숲으로는 광릉숲도 있고, 이팝나무 꽃이 아름다운 밀양 위양지도 있으나. 상림숲이 아름다운 건 천 년의 숨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곧게 자란 나무도 아니고, 잘 다듬어 놓은 나무도 아니다. 인기 있는 수종만을 골라 키운 숲은 더더욱 아니다. 산과 들에서 자유롭게 자란 것처럼 자연미가 어우러지게 가꿔온 숲이다. 숲은 그에 보답하듯 철 따라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얼었던 땅이 녹기 시작하면 이곳 숲은 바빠진다. 이만여 그루의 나무들은 겨우내 막아놓았던 관다발 떨 커 층을 열고 물을 올리느라 쉴 틈이 없다. 부지런한 갯버들이 버들강아지를 피우고, 뒤를 이어 능수버들이 곁눈을 연다. 덩치 크고 나이 많은 굴참나무는 숲의 높은 곳에서 때를 기다린다. 산수유, 진달래 피고 봄기운 완연해지면 조심스레 곁눈을 열고 연두색 어린잎을 삐죽이 내민다.

  바쁜 것은 숲만이 아니다. 너른 연 밭 개구리들이 산란준비로 분주하다. 실한 연 줄기 사이 목 좋은 곳을 골라 뭉텅뭉텅 알을 낳는다. 흩어지지 않도록 연 줄기 사이에 단단히 여며 놓는다. 몸 푼 녀석들은 알 주위를 헤엄치며 구성진 노랫가락으로 수련을 깨운다.

  숲의 상층부는 소나무, 굴참나무, 느티나무들이 중간 부분은 이팝나무, 백동백 나무, 산딸나무들이 높이를 맞춰 조화를 이룬다. 나무 사이사이도 빈틈이 없다. 개머루, 담쟁이, 인동초, 청미래덩굴이 틈새를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햇빛이 부족하여 남아있던 바닥은 석산, 맥문동이 터를 잡았다.  

  나무들은 여름이면 더 분주해진다. 햇빛 한 줄기라도 더 받으려 경쟁이 치열하다. 추워지기 전 엽록소를 충분히 만들어 가지를 튼튼히 해야 하고. 겨울 지낼 양분도 저장해 두어야 한다. 잎을 최대한 넓게 펴고, 조그만 틈새라도 비집고 올라가 한 줌 햇빛이라도 더 받으려 키도 키운다. 그래서 여름의 상림숲은 하늘이 보이질 않는다. 그럴 즈음 가장 게으른 석산이 땅을 비집고 올라온다. 그는 그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키 작은 탓에 여름 햇빛은 포기하고 낙엽 진 늦가을 잎을 피워 햇빛을 받으며 봄까지 견딘다. 게으른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삶이다.

  한낮 기온이 오르면 가장 신명 난 곳은 연 밭이다. 백오십여 종의 연꽃과 물양귀비가 앞 다투어 화장을 짙게 하고 화려함을 뽐낸다. 해가 지면 오그라드는 자오련, 왕관을 닮았다는 밤에 피는 빅토리아 수련, 꽃자루에 가시가 돋은 가시연, 안쪽과 가장자리에 뽀송뽀송 솜털이 예쁜 어리연이 맵시 자랑이다. 아름다움이 흔해 귀한 줄 모르는 연밭이다. 숲 사이 구불구불 도랑도 넉넉한 인심으로 쉼 없이 물을 보내 숲을 키운다. 모두에게 바쁜 계절이다.

  초가을 상림숲은 석산 천지다. 피침 모양 붉은 꽃잎 여섯 장을 우산 모양으로 펼쳐 화려함을 뽐낸다. 석산이 아름다운 곳으로는 영광 불갑사, 고창 선운사도 있으나 숲과 조화를 이루며 산책길 따라 피는 이곳도 뒤지지 않는다.

  석산 꽃잎이 지고 잎이 날 때면 상림숲은 월동준비로 바빠진다. 혹한에 동사하지 않으려면 줄기에 남아있는 수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먼저 잎으로 가는 관다발에 떨 커 층을 만들어 수분을 차단한다. 관다발이 막혀 목이 마른 나뭇잎은 서서히 쇠약해진다. 그렇다고 왕성했던 젊음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쉽다. 카로티노이드로 노란색을, 안토시안으로 붉은색을 만들어 온 몸을 화려하게 꾸미려 안간힘을 쓴다.  

  이런 단풍의 심정을 알기나 하는지?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른다. 누군가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고 지나가며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을 읊는다.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겨울이 되면 이곳은 허허롭다. 목청 터져라 울어대던 개구리도, 살랑대던 나뭇잎도, 화려함을 뽐내던 연꽃도 자취를 감춘다. 오직 삭풍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 된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태어난 곳을 지켜야 할 숙명을 타고난 나무들은 혹한을 견뎌야 한다. 몸통을 살리려면 여름에 과식으로 웃자랐거나 병든 가지는 삭풍에 내어 주어야 한다. 불어난 몸이 문제라는 걸 후회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도랑물도 주변 나무들이 눈보라와 싸우며 힘들어할 땐 고통을 같이해야 한다. 겉을 꽁꽁 얼려 죽은 듯 조용히 하고, 밑으로 조금씩 흘려보내 목마른 친구들을 도와야 한다. 상생하며 살아가는 지혜다.   



  이 숲을 즐기는 방법은 위천 따라 걷다가, 숲 사이‘사색길’을 걷는 것도 좋고. ‘천년 상림’ 길로 올라가다 연밭을 돌아 내려오는 길도 좋다. 봄에는 연둣빛 어린잎, 여름이면 진한 녹색 잎, 가을이면 불타는 낙엽을 보는 것도 좋고, 눈 덮인 상림숲의 적막함을 느낄 수 있는 겨울도 좋다. 상림숲은 지금도 우릴 기다린다.(사진 :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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