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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Feb 28. 2022

가방 여행기

여행자는 따라다니는 가방을 이해하지 못했다 

   창고 깊숙한 곳에 처박혀 지낸 지 몇 개월이 지났다. 여행 갈 때 아니면 관심조차 두지 않으니 없는 듯 지내는 날이 대부분이다. 처음 살 땐 달랐다. 항상 같이 다닐 듯 이것저것 따지고 살펴보며 신중하게 골랐다. 색상은 물론 디자인도 살피고 쓸모도 따졌다. 바퀴는 잘 구르는지, 튼튼한지, 크기는 적당한지, ‘TSA’ 잠금장치가 있는지 평생 같이할 반려자를 고르듯 이것저것 살펴보며 귀하게 대했다.

  창고에 깊숙이 있다고 잊힌 건 아니다. 일 년에 두세 번 나오는 날이 있다. 참고 기다린 건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꺼내주는 즉시 강아지가 복종 표시로 주인에게 배를 드러내듯, 배를 쫙 열어젖혀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손잡이를 길게 뽑았다가 넣어보고, 지퍼도 열었다 잠그길 몇 차례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잠금장치 이상유무를 확인하는 것으로 몇 개월 만에 만난 인사를 대신한다. 잘 있어 주었다고 고마워하거나 반갑게 여기 지도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뻔뻔하게 대함이 어제오늘만은 아니다. 쌀쌀맞게 대해도 창고에서 꺼내 준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제부터 새로운 곳을 동행하며 즐기기만 하면 된다.   

                                                       


  배를 벌린 채 거실에서 대기하고 있다. 생각날 때마다 한 가지씩 챙겨 오며 여행에 대한 설렘을 즐기는 듯 흥얼대기도 한다. 덩달아 나까지 들뜬 기분이다. 하나둘 준비물을 받아들이는 순간 동반자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춥다는 예보에 두꺼운 외투며 장갑을 챙기더니. 단풍이 절정이라는 소식에 화려한 옷도 꺼낸다. 이것저것 걸쳐보며 가을과 어울림을 그려보기도 한다. 구색에 맞춰 멋을 내려면 머플러, 모자도 챙겨야 한다며 분주하다. 변덕이 어찌나 심한지 짐 챙기는 걸 한 번에 끝내는 경우가 없다. 기상예보가 바뀔 때마다 넣고 빼기를 몇 차례 반복한다. 거기다 더해 응급약, 비타민, 우산을 챙기더니 충전기며 머리 손질용 롤에 화장품까지 꼼꼼하게 챙겨 넣는다. 

  몇 차례 동행했던 터라 챙기는 옷가지를 보면 어디를 가는지 짐작이 간다. 이번엔 좀 달랐다. 가을 겨울옷을 동시에 챙기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두 계절이 존재하는 북미 쪽으로 가는 듯하다. 

  감당해야 할 부피가 점점 늘어난다. 뱃속에 넣을 수 있는 최대치가 이십팔 리터라는 걸 전혀 고려치 않는다. 누르고 조이며 쑤셔 넣는 건 예사다. 그런 경험을 몇 차례 했던 터라 팔자려니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다. 그보다 지퍼가 터져 팝콘 튀겨져 나오듯 주체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까 걱정이다. 그런 일이 없도록 끌어안으려니 더 힘들다.

  올봄 미국 여행 따라갔을 때, 덩치 큰 흑인이 무겁다고 신경질적으로 던지는 바람에 잠금장치가 터진 사고가 있었다. 공항 바닥에 난전을 펼쳐 놓은 듯 옷가지며 화장품, 신발이 흐트러지고 머리 손질 롤이 굴러다녔다. 주워 담느라 혼비백산했던 일은 기억조차 싫다. 그때 어깨가 으스러지고, 모퉁이가 찌그러지는 상처를 입었다. 상처 입는 일은 버스 화물칸에 실려 공항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겪는 흔한 일이다.   

                                                 


  공항에 도착하면 검진부터 받아야 한다. 먼저 체중을 잰다. 무리하게 쑤셔 넣어 몸이 불어난 터라 은근히 걱정이다. 다행히 물살이라 이십삼 킬로그램을 넘진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문진 하듯 뱃속에 무엇이 들어있냐며 꼬치꼬치 물어댄다. 배터리나 헤어스프레이같이 폭발 위험성 있는 물건은 없느냐? 묻고는 바코드 찍힌 팔찌 하나를 손잡이에 채워준다. 팔찌가 채워지자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았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날 때 다시 한번 정밀검사를 했다. 엑스레이로 뱃속을 샅샅이 살폈다. 기분 나쁘지만 건강하게 여행을 따라가려면 참는 수밖에 없었다.

  바코드 팔찌를 물류 기계는 쓱 지나만 가도 척척 읽어낸다. 능숙하게 목적지별로 분리하여 갈라 보낸다. 잠시 끌려가다 입을 벌리고 있는 커다란 컨테이너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곳에는 먼저 온 다양한 친구들이 제멋대로 쑤셔 박힌 채 모여 있었다. 가득 채워지자 뚜껑을 닫더니 몇 개의 컨테이너를 연결시켜 어딘가로 끌고 갔다. 냉난방도 안 되고, 소음이 무척 심한 맨 밑창에 컨테이너 채 집어넣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들과 꼼짝 못 한 채 갇혀버렸다. 이런 상태로 몇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창고에 처박힌 채 몇 개월씩 참으며 인내심을 길렀던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됐다. 

  잠시 후 고막 터질 듯한 엔진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뒤쪽으로 온몸이 쏠려 압사 직전이다. 이륙이 끝나 안정 상태가 되자 몸통을 십자 모양 벨트로 동여맨 검은색 가방이 말을 걸어왔다. “왜 이렇게 밀리고 난린가요?” 아마 처음 여행길에 나선듯하다. 조금 참으면 괜찮아진다며 안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래도 뭔가 잔뜩 불안한 듯 “우리 주인은 여기 탔을까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소리는 왜 이리 크게 나나요?” 질문이 끝이 없다. 처음 비행기 탔을 때 그랬던 생각이 떠올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십여 시간 후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를 진주 집어먹은 거위로 의심하는지? 가는 곳마다 엑스레이로 배속을 찍어대고 검사를 한다. 의심이 풀리고 나서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았다. 같이 왔던 검은색 가방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엑스레이 검사원이 노란색 스티커를 겉면에 붙였다. 그것을 본 세관원이 구석진 곳으로 검정 가방을 데리고 갔다. 지퍼를 열라 하더니 내용물을 몽땅 쏟아놓고 자세하게 조사하더란다. 면세점에서 산 명품가방을 신고하지 않아 걸렸다고 했다.    

                                                      


  공항을 나서면 새로운 고생이 시작된다. 도로 바닥은 돌로 만든 이빨을 박아놓은 듯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지날 때마다 뼈마디가 흔들리고, 바퀴는 틈 사이에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한다. 거리를 끌려 다닐 때가 최악이다.

  온종일 시달리다 호텔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아무리 피곤해도 먼저 배를 열어 놓아야 한다. 내일 ‘로키’를 간다며 두꺼운 외투에 모자, 방수 신발을 꺼낸다. 소화된 듯 배가 텅 빈 느낌이다. 그건 잠시뿐, 공항에서 쇼핑한 걸 채워 넣으니 도로 빵빵해졌다. 여행(travel)이란 고난(travail)이라는 어원에서 나왔다고 한다. 왜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 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부딪치지 않으려 피하고, 배 터질세라, 바퀴 빠질세라, 손잡이 부러질세라 신경 쓸게 한둘이 아니다.

  동행하며 즐거운 여행을 기대했던 게 착각이었다. 버려진 듯 무관심하게 처박혀 있어도 편안히 쉴 수 있는 창고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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