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이 춤을 추면 벽난로 앞은 아고라가 된다.
아궁이 속에서 춤판이 벌어진다. 불꽃 축제다. 장작 불꽃은 춤에 심취된 듯 ‘탁-탁’ 소리를 내기도 하고, 열기에 지친 듯 보글보글 거품도 뱉어낸다. 활활 타는 장작더미 속심을 들여다본다. 모든 걸 휘어잡을 듯 이글거리는 춤사위도 있고. 때론 강렬하게, 때론 하늘거리는 춤사위가 유혹하는 듯하다. 불꽃이 잦아들어 춤사위가 시들해지면 장작 두어 토막을 던져 넣는다. 꺼져가던 불꽃들이 화들짝 놀라 불티를 날린다. 사방으로 날리는 불꽃놀이를 놓치지 않으려 아궁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불꽃놀이가 끝나면 장작은 연기를 피워 1막이 끝났음을 알린다. 암전 후 새로운 불씨가 살아나 장작을 먹어치우기 시작하면 서서히 연기가 사라지면서 2막 불꽃 춤판이 시작된다. 불꽃에 취해 볼이 불그스레 익어가는 줄 모른 채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아궁이에서 보았던 불꽃 춤은 평생 추억으로 남았다. 웃풍에 겹겹이 옷을 껴입을 일도 없고, 보일러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아파트의 편리한 삶에서는 장작의 매캐한 훈연의 추억이나 아름답던 불춤의 기억을 끄집어낼 순 없었다.
쉰 살이 되던 해 어릴 적 장작불의 추억을 잊지 못해 벽난로를 설치하기로 했다. 아궁이가 있는 집, 불춤 추는 무희들이 다가와 볼에 입맞춤하는 따스함을 느끼며 차를 마시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파리 여행 중 보았던 아파트 옥상에 설치된 여러 개의 벽난로 굴뚝 생각이 났다. 집을 지으며 거실 구석에 벽난로를 설치하기로 했다. 벽난로 설치는 매립형과 노출형 중에서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열효율은 다소 떨어지나 안전성과 거실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매립형을 선택했다. 비용은 마감재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수천만 원대 벽난로도 있었다. 이백 년 역사가 있는 프랑스 ‘스프라社’ 제품 중에서 40평대 거실에 적합한 난로를 선택했다.
벽난로를 설치하며 산골 사는 사람처럼 장작 패는 재미도 느끼고 싶었다. 도끼도 사고, 통나무를 절단할 전기톱까지 장만했다. 수소문 끝에 참나무 한 트럭도 구했다. 크레인으로 참나무를 옥상으로 올렸다. 이럴 때를 대비해 공간을 마련하고 구조설계를 반영하여 안전상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옥상에서 장작을 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난제를 커다란 벽난로 입이 해결해 주었다. 웬만한 통나무는 통째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밀레의 「장작 패는 사람」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근육질을 자랑할 멋진 도끼질의 꿈은 포기해야만 했다. 겨울 오기 전, 통나무 절단 작업을 끝내느라 주말이면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옥상을 점령했다. 잘린 참나무는 옥상 양지 바른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가지런히 쌓아놓은 나무토막은 차가운 콘크리트 벽면을 부드럽게 바꿔놓았다. 참나무 토막은 건조되면서 나이테를 끊고, 살이 터지는 아픔을 감내하며 지난 세월과 단절하려는 듯 틈을 만들어 갔다. 나이 어린 가장자리 나이테를 먼저 끊어내고 수십 년 된 속심 나이테만은 마지막까지 지켜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강렬한 햇빛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갈라진 틈새는 장작더미에 문양을 그려 넣은 듯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비가 오면 갈라진 틈새에 물을 머금어 색상 톤을 변화시켜 생명을 잉태하는 듯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고. 눈 쌓이면 솜이불을 덮은 듯 포근하게 변신을 한다.
거실에 된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벽난로에선 불꽃 춤판이 벌어진다. 그럴 때면 난로 앞은 아고라로 변했다. 붉은 카펫 위에 에스프레소 커피 향이 감돌고, 은박지로 감싼 고구마가 난로 속에서 익어갔다. 아궁이 불꽃이 구들장을 달구었다면 벽난로 불꽃은 거실 공기를 덥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작이 타면서 ‘탁-탁’ 소리를 내고, 보글보글 거품을 품어내는 것도, 이글거리는 불꽃도 어릴 적 본 아궁이 장작불을 닮았다. 밤늦도록 참나무 훈향에 취해 벽난로 앞은 이야기꽃이 끊이질 않았다.
이야기가 끝날 쯤이면 불꽃도 힘을 잃어간다. 단단하고 육중한 참나무 토막을 한 줌의 재로 만들 만큼 강렬했던 불꽃이었다. 새 장작을 던져주면 굶주린 용이 이글거리는 불을 뿜으며 달려들어 삼켜버릴 것 같은 기세로 타오르던 불꽃이었다. 그랬던 불꽃이 장작을 중단하자 급격히 쇠퇴해 갔다.
밑바닥에선 살아남으려 몸을 태워 만든 재로 꺼져가는 불씨를 감싸 안는다. 최소량의 산소를 공급받아 오랫동안 불씨를 살려두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새 장작이 들어올 때 살아나기 위한 연명 조치다. 성질 급한 몇몇은 재로 변하기도 전에 숨을 끊고 까맣게 숯이 되었다. 재가 감싼 불씨는 겨우겨우 다음 날까지 살아남았다. 재로 변했음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희생한 결과다. 불씨를 살려놓은 재는 생을 마감하고 폐기물 취급받아 벽난로를 떠났다. 살아남은 불씨는 사라진 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 채 화려하게 부활하여 오늘도 불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