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따뜻한 보이차 한 잔 따라 주어야겠다.
유난히 덥던 여름이 지나자 아침저녁으론 서늘한 가을바람이 창문을 넘어온다. 서늘한 바람맞이는 보이차 한 잔이 제격이다. 낙엽 타는 냄새를 살짝 섞은 듯한 향이 좋고, 찻잔을 감싼 손끝의 따스함이 좋다.
우리 집엔 다실이 있다. 아내의 유일한 취미였던 다도(茶道)를 위한 방이다. 아내가 서예에 몰두할 때 서실(書室)로 활용하던 곳을 아예 다실로 꾸몄다. 벽면에는 다관(차주전자)과 찻잔을 진열할 선반을 설치하고, 한구석에 보이차 및 소도구들을 보관할 찻장도 들였다. 방 중앙에는 담소 나누며 차를 마실 나지막한 고재(古材) 차 탁자를 놓았다.
다실 꾸밈은 아내의 취향을 최대한 반영했다. 그동안 틈틈이 모아놓은 보이차 종류가 다양했다. 보이차의 본고장이라 알려진 중국 윈난 성의 ‘맹해 차장’에서 생산된 것들로 고가부터 실속제품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생차, 숙차로 구분하여 원반 모양의 병차, 벽돌 모양의 전차, 둥지 모양의 타차 등 형태도 가지각색의 차들이다.
아내의 다도에 대한 호기심은 대만여행으로 연결되었다. 타이베이역에서 완행열차 같은 느린 기차를 타고 신베이市 잉거 역에 내렸다. 이곳은 이백 년 전부터 도자기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공방이 모여있는 곳이다. 지리적 특성상 점토 성분이 많은 지질과 장작이나 석탄 등의 자원이 풍부했던 탓에 점토성금(點土成金) 즉, 흙을 빚어 금을 만든다고 할 정도로 도공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도자노가(陶瓷老街)로 불리는 옛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양옆에 즐비한 도자기매장과 茶 전문 상점을 들락거리며 보이차 시음을 하는 것도 흥미롭다. 건성건성 걷던 아내의 매 눈에 다관이 발견되었다. 흙으로 대나무 형태를 빚어 손잡이를 만들고, 진흙의 원색을 유지한 독특한 모습의 다관에 앙증맞은 찻잔 6개를 포함한 세트를 구입했다. 이곳을 찾은 목적을 달성했다며 즐거워한다.
그것 외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구입한 다관이 삼십여 종이다. 백자 다관, 유리 다관, 화산석 다관 그 외 대부분은 자사(紫砂) 호라 칭하는 자주색 모래흙으로 만든 다관 들이다. 자사호는 철 성분이 많은 토양으로 고온으로 굽는 과정에서 흡수성과 공기 투과성을 갖게 되어 차 맛을 좋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보이차 마시기 좋은 계절은 가을부터 겨울이라 할 수 있다. 따뜻하게 마실 때 차향이 잘 우러나기 때문이다. 끓는 물을 붓고 첫 번 우린 찻물은 버린다. 세차(洗茶)라 하여 먼지, 잔류농약 성분 같은 것을 정화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 우려낸 찻물은 황금빛으로 색과 향, 맛이 가장 좋다. 찻잔을 손으로 감싸 따스함을 느끼며 천천히 차 맛을 음미한다. 따뜻한 찻물의 목 넘김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조금씩 우려내는 시간을 늘리며 4번 정도 우린 다음 새 찻잎으로 바꾸며 차를 즐긴다.
내가 보이차를 마시게 된 건 아내의 권유였다. 은퇴 후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아내와의 대화시간을 차를 통하여 만들어 갔다. 아내는 차를 우려내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 번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보통 1 리터 정도 마셨던 것 같다. 이야기 속에 아내의 사랑이, 우리의 삶이 묻어 나왔다. 그래서 함께 보이차 마시는 시간이 좋았다.
홀로 집에 남아 아내가 남기고 간 찻장을 열어봤다. 주인 잃은 찻잔, 다관 등 차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잘 숙성된 보이차 향이 찻장에 배어있다. 아내가 사용하던 찻잔을 꺼내 향을 맡아본다. 아내의 향은 사라지고, 보이차 향만이 은은하게 풍겨 야속한 생각이 든다.
보이차를 우려 따끈하게 덥힌 찻잔에 찻물을 채우고 손으로 감싼 채, 발코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이한다. 바람길 따라 뒷산 ‘왕가봉’ 끝자락을 바라보니 천천히 가을이 내려온다. 머지않아 하나둘 낙엽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쓸쓸한 겨울을 맞이하겠지! 은하수 공원에 홀로 있는 아내는 어찌 혹한 겨울을 이겨내려나…. 낙엽 지기 전 따뜻한 보이차 찐하게 우려 아내에게 다녀와야겠다. 보이차 향내 맡으며 행복했던 추억을 기억하며 행복해하면 좋겠다.
오늘도 보이차 찻잔 감싸 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