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사기정골’에 저수지가 있다. 어릴 적 놀이터고, 목욕탕이고 추억의 장소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책보자기를 마루에 던져놓는다. 허겁지겁 찬장 속 삶은 감자 몇 개로 허기진 배를 채운 뒤, 논둑길 따라 한달음에 저수지로 달려간다. 누구와 약속할 것도 없다. 그곳에 가면 항상 또래들이 있다.
훌렁 벗고 저수지에 뛰어든다. 남자들은 발가벗고, 여자애들은 아래 바지를 입은 채 물놀이를 했다. 팔월인데도 저수지 물은 제법 차갑다. 헤엄 못 치는 애들은 가장자리 석축을 잡고 물장구 놀이를 하고, 헤엄 좀 친다는 까불이 몇몇은 저수지를 가로질러 건너기 시합을 한다. 계곡을 막아 만든 저수지는 수심이 깊고, 폭이 넓은 곳은 백여 미터 넘는 곳도 있었다. 건너다 지치면 위험할 수도 있건만 무서워하지 않았다. 으스대며 빨리 건너려 개헤엄을 칠 뿐이다.
저수지 옆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는 오두막집 한 채가 있다. 여름엔 녹색이, 가을엔 노랑이 잘 어울리는 집이다. 꼬맹이들은 물놀이 끝나면 은행나무 아래 평상으로 몰려갔다. 그 집에는 또래였던 예쁜 여자애가 살았다. 우리가 갈 때마다 같이 놀자며 평상으로 나왔다. 동그란 눈과 갸름한 손이 참 예뻤다. 저수지 가는 핑계가 하나 더 늘었다. 6학년이 되면서 멱 감는 것보다 그 애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중학생이 되면서 오두막집 소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읍내 학교에 다니느라 저수지에 갈 기회가 줄어들고, 찾아가려니 멋쩍고 쑥스러웠다. 괜스레 두근거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신경 쓰였다. 중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던 그 애와는 마주칠 기회도 없었다. 만날 핑계를 만들어야 했다. 토요일 밤, 또래 몇 명이 재도네 사랑방에 모였다. 어머니와 둘만 살고 있어, 놀기에 그만한 곳이 없었다. 윷놀이 핑계로 그 애를 불러냈다. 여자 남자로 편을 갈라 빽도 놀이를 했다. 지는 편에게는 꿀밤을 주거나 팔뚝 때리기 벌칙을 준다. 손을 잡아보려는 속셈이다. 어떤 날에는 내기로 ‘라면땅’ 과자를 사다 먹으며 토요일 밤을 즐겼다.
놀이가 지루할 때쯤, 누군가 갑자기 등잔불을 껐다. 순간 어둠이 사랑방을 감싸 안았다. 여자들은 무섭다고 불을 켜라며 키득거린다. 누군가 “키스 타임이야 키스 타임.”이라며 웃기려 든다. 서로 성냥 통 찾겠다며 더듬거리다 손이 겹친다. 누구 손인지 알 수 없으나 찌릿한 전율이 느껴진다. 가늘고 부드러운 촉감이다. 덥석 잡고 싶은 이성의 촉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의도적인 불 끄기는 언제나 짜릿했다. 서울로 진학하면서 ‘사기정골’ 저수지의 추억은 희미해졌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사기정골 저수지는 그대로다. 오두막 대신 콘크리트 건물이 자리 잡고, 은행나무 밑 평상 쉼터는 근사한 카페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은 날은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직 덜 노래진 은행잎이 빗방울을 받아내느라 힘겨운 듯 흔들거린다. 이르게 가을을 받아들인 노랑 잎은 몇 번 버텨보다 생을 포기한 듯 손을 놓아버린다.
저수지와 마주한 이 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오랜만에 나란히 앉아 가을비를 받아내는 저수지 물결을 바라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멍하니 빗줄기만 바라본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알고 지낸 세월이 십여 년인데 어색한 분위기는 뭐람? 철 지난 저수지 오두막집 소녀에게 느꼈던 두근거림도 아닐 것이고, 삼십 대 젊은 시절의 연애 감정은 더욱 아닐 텐데…!
암튼 맞선 보는 분위기다. 아내가 아닌 여성과 마주 앉아 본 기억이 너무 오래된 탓이리라. 가을이 저수지에 빠져 형형색색 담겨있다. 메타스퀘어, 단풍나무, 은행나무까지 저수지에 담겨 시선을 빼앗는다. 가을비가 저수지와 합세하여 분위기를 잡아주는데도 어색함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진한 커피 향이 침묵을 가른다.
"커피 향이 좋아요." "비 오는 날이라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네요."
한마디 맞장구가 자연스레 십여 년의 친분으로 이어준다. 첫마디 시작이 다양한 대화로 넘어가 수다 단계로 접어든다. 건강문제, 취미, 홀로 서는 어려움 깊게는 과거 사생활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남자라고 수다 떨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깰 분위기다. 수다가 시간을 잡아먹는 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 바닥을 다 덮을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 벌러덩 소파에 누웠다. 저수지에 빠진 가을을 생각해 본다. 밍밍했던 저수지에 가을이 빠지니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음이 좋았다. 삶을 다하고 쓸모없는 낙엽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저수지와 어우러지니 새롭게 보여질 수 있음이 희망으로 다가온다. 어릴 적 오두막집 소녀에게 느꼈던 설렘이 가슴 한구석에 조금이라도 남아 불씨가 되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