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해도 해도 너무하오

할 말 못 하면 병 된대요

by 이광주

여보! 어떻게 지내오?

잔소리할 내가 없어서 심심하진 않으오. 나도 이것저것 당신이 참견한다고 구시렁거릴 때가 그립소. 말할 당신 없으니 입에 거미줄 칠까 걱정할 정도요. 은하수 여행 간다고 떠난 지 벌써 6개월이나 되었소. 당신 없으면 못 살 것 같더니 지지고 복고 그냥 살아집디다. 그동안 못한 말 좀 해야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는 생각뿐이오. 여보 왜 집을 떠난 거요? 좋은 곳도 아니고 바람 막을 것도 변변찮은 곳에 왜 홀로 누워 청승 떠는 거요? 내가 싫으면 나가라고 하던지? 그것도 아니면 당신 세종 집 있잖소 그곳으로 가면 되지…. 생각할수록 분해 죽겠소.

하기야 당신 멋대로 한 것이 이번만은 아니지만. 그동안 당신 눈치 보느라 못했던 이야기를 해야겠소. 돌이켜 보면 당신은 나를 어린애 취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소. 휴일 모처럼 편하게 쉴라치면 씻어라, 면도하라, 머리 좀 단정히 하고 있어라. 하루라도 편하게 놔둔 적 있소? 그것뿐이 아니오. 외출할라치면 셔츠, 재킷, 바지 심지어 벨트와 구두 색상까지 당신 취향에 맞게 골라주고 입으라 하니, 난 개성도 없고 취향도 없는 줄 아시오. 내가 어린애요?


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 주장이 강했던 거 인정하지요. 연애할 때 얼마나 나를 애타게 했는지 기억이나 하오. 이십 대 주체할 수 없을 때 몇 년을 사귀면서 호텔 가자, 여관 가자 애원해도 얼마나 냉정하게 굴었소. 그러다가 좋은 침대 다 놔두고 소요산 계곡 캠핑 가서 딱딱한 텐트 바닥에서 첫사랑을 나누게 할 게 뭐요. 그래도 그때가 그립소.

그리고 바람 이야기도 해야겠소. 다시 말하지만 난 당신 말고 바람피운 적 없소. 회사 야유회 갔다 올 때 머리 긴 여직원 옆자리 태우고 왔다고 당신 선배가 고자질 전화해서 얼마나 심하게 싸웠소.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내 말은 믿지 않고, 상상의 그림을 몇 장이나 그렸소. 속상한 그 마음 천만번 이해하오. 이제라도 진심을 믿어주고 잊어버리시오.

하기야 당신 심정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오. 술 마시면 직원들 데리고 이차 삼차 몰려다니며 노래방 가서 머리에 화장지 두르고 도우미 끌어안고 춤추다 와이셔츠 깃에 립스틱 묻혀 오면 기분 좋을 여자 누가 있겠소. 나라도 화를 냈을 거요.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다음 날이며 나도 미안한 생각 많이 했소. “술이, 웬수요! 술이.” 그래서 퇴직하면서 술 끊었잖소.

평소 당신 앞에서 가장 기를 펴지 못한 게 뭔지 아시오. 친구한테 삼천만 원 빌려주었다가 떼인 돈 이야기만 나오면 쥐구멍으로라도 기어들고 싶었소. 헛똑똑이라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찰 땐, 땅을 치며 수없이 후회했소. 멍청한 짓 했다고. 여보 잊어버리시오. 그 녀석은 홀라당 망했고, 우린 돈 걱정 없이 살았잖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당신 같은 여자는 요즘 세상에 없을 거요. 엊그제 옷장 열어보고 깜짝 놀랐소. 당신 옷보다 내 옷이 더 많은 걸 보면서 당신은 여자도 아니라고 탓했소. 무슨 여자가 백화점 가면 자기 옷보다 남편 옷 먼저 사주는 경우는 뭐요. 내가 그렇게 꾀죄죄하게 보였소. 당신 심성 모르는바, 아니오 마는 미안한 마음이 커서 그래요.


참, 엊그제 딸하고 당신 핸드백 정리하다 숨겨놓은 돈 발견했소. 뭐에 쓰려고 비자금을 모아놓은 거요. 신용카드 마음대로 쓰라고 주었는데도 쓰지도 못했으면서…. 결국 모아놓고 쓰지도 못하고 갈 거면 모으긴 뭐 하러 큰돈을 모아놓았던 거요. 저승 가는 장례비 없을까 봐 그런 거요.

난 한심한 남편이었소. 당신이 변해가는 걸 조금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후회가 크오. 이순(耳順)이 지나면서 당신도 조금씩 변해갔었는데! 내 코 고는 소리 핑계로 잠자리하는 걸 싫어하고, 방까지 따로 쓴다고 할 때 정(情) 떼려 한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남자로 느껴지지 않아 버림받은 것 같은 자존감으로 서운하게만 생각했으니 말이오.

그런 일 말고도 차를 함께 마시며 고맙고 안쓰럽다는 말을 자주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천사처럼 말하질 않나, 손잡고 산책하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할 때 변해가는 걸 느꼈어야 했는데…!

당신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던 거요. 그렇게 잘해주다가 갑자기 훌쩍 가버리면 다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제멋대로 행동이오. 다른 건 다 용서하고 이해해도 말 한마디 없이 갑자기 떠난 건 용서할 수 없소.


오늘 후련하오. 말하지 못해 답답했었는데 묵은 이야기 다 풀어놔서. 당신도 할 말 있으면 참지 말고 해요. 가슴에 담아두면 병 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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