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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비 Sep 27. 2022

여자 혼자 캠핑합니다

DAY1 육지여행의 시작점 고흥

제주-녹동항 배에서 장장 4시간 동안 멀미로 고통받다가 밤 9시에야 도착했다. 배가 너무 고파 편의점 짜파게티를 한입 먹고는 멀미가 재발해 입맛이 싹 사라졌다.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 가벼운 몸으로 첫 캠핑장으로 향한다.


이 세상에 남은 빛이라고는 내 차에서 쏘는 하이빔만 있는 것처럼 저녁의 고흥은 칠흑 같은 어둠 뿐이다. 겨우겨우 거금도 연소해수욕장에 도착했는데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바다조차 호수처럼 고요한 것이 이 곳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문이 굳게 잠겨 있는 샤워장만이 여름 한 때 북적일 이 곳 야영장의 모습을 상상케했다.


한 대 주차되어 있는 캠핑카에 누가 있을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향한다. 그 외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이 해변의 밤공기만큼 쓸쓸함이 느껴졌지만 안도감이 더 크다. 새벽녘 호다닥 달아나던 강아지 한 마리만 봤을 뿐이다. 귀여운 털 달린 짐승녀석-

잠에 들기 아쉬웠다. 눈이 천근만근 졸렸지만 조용히 내려앉은 풀벌레소리와 공기의 이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선선함이 황홀했다. 한국에도 이렇게 별이 많구나-라고 처음 느껴본 밤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반짝 반짝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이 별이 (혹은 인공위성이) 크게 빛나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빛나다가 사라졌다 움직였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아름다운 이 밤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를 바라며 아주 천천히- 모든 것을 바라봤다.


아침 해가 밝고 날은 맑고 선명하다. 밤 사이 놀랍게도 머리는 하나도 눌리지 않았고,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던 별들이 아침 파도에 녹아들어 바다의 윤슬이 되고, 투명하게 푸르러서 마치 변기의 파란물 같다고 생각해왔던 하늘도 푸르다.


캠핑의 묘미는 이런거였다.

어두움에 잠식당한 풍경들이 아침이 되면 큰소리로 외치는 것 말이다. 나는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나는 이렇게나 푸르르다고. 이것들도 벤치에 앉아 먹는 사과와 함께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

내리쬐는 햇빛에 강제 기상


거금도 해안가를 따라 가다가 멈췄다 또 가다가 멈췄다를 반복하니 시내에 도착했다.

비빔밥을 먹고 거금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조금은 서울의 그것 같은 카페를 찾아갔다. 역시나 거금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핸드드립 카페였다.

투박한 시골에서 도시의 맛이라니. 1석2조가 따로 없군. 사장님들은 역시나 서울 사람이고 고흥에 와서 카페 터를 찾는 중 거금도의 풍경에 반해 이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역시 사람들 보는 눈은 똑같구나 싶다. 휴먼들아 세상에 숨길 수 없는게 기침과 사랑이라더니 거금도의 아름다움은 왜 쏙 빼먹었나요. 이 곳에 같이 오고 싶은 사람들이 몇 몇 떠올라 (엄마, 소훈이, 경민이) 웃기게도 살짝 울었다.


섬을 떠나기 아쉬워 배회하던 중 자전거 무료 대여 공간을 발견했다. 고흥군이 동네방네 소문내는 지붕 없는 미술관보다 이런 무료 서비스가 더 반갑다.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던데 그래서 내 머리가 이렇게 많이 빠지는건가.


자전거를 빌려 야무지게 내 가랑이를 혹사시키며 거금대교에서 소록도까지 달렸다.

강한 바닷바람에도 노란색 페인트가 하나도 벗겨지지 않은 이 대교는 아주 튼튼하고 새것이다. 섬과 섬을 이어주는 이 대교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들의 모습은 어떠할지 생각해봤다.

좀 멋있는 생각인데 인스타그램에 올려야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모자가 날아갈 뻔 해 분위기를 깨버렸다.


어느새 소록도에 도착. 오르막길이 너무 심해 자전거를 끌고 걷다 보니 표지판들에 써있다.

소록도는 한센인이 치료 및 요양을 하고 있는 국립병원이니 출입시간을 준수해주세요.

예부터 소록도는 한센인들을 치료하는 명목으로 가둬버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60년대에 오마도 간척사업을 진행하며 한센인의 사회 복귀를 꾀했지만 이마저 지역사회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무산되었다고.


내가 아름답다고 찬미만 하던 이 섬들은 그들에게 어떤 장소였을까. 한센인들이 바라본 고흥의 모습을 생각하며 한센인추모공원에 들려 잠시 묵념했다.


해는 뉘엇뉘엇 지고 국립공원 야영장 체크인 시간은 다가오고 급해진 마음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난 남들과는 다르게 달려 오늘 밤 캠핑지인 팔영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근데 웬걸 실제 예약한 팔영산 국립공원 야영장은 지금 도착한 팔영산 자연휴양림과는 다른 곳으로 20분이나 떨어져 있었다.

누가 보면 겨우 20분 갖고 호들갑이다 싶겠지만 이 고흥의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운전해본다면 알 것이다. 게다가 여기는 산 중턱이 아닌가! 꼬불꼬불 낭떠러지 길은 네팔에서만 봤는데 정말로 절벽 위 낭떠러지 산길을 한 밤중에 돌아가야 하는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리를 달달 떨어야했다.

끼이익-소리 나는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내 용기도 끼이익- 기스가 간다.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팔영산신령님이 도우셨는지는 모르지만 야영지에 무사히 도착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길을 함께 달려온 Gal Costa의 음악을 멈추고 나름 차분하게 하루를 마무리해본다. 오늘 밤도 별들이 많이 보이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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